1997년 1월에 들려온 한보 부도 소식은 '국가 부도' 위기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민간 금융 위기는 국가 위기로 확대됐다. 1997년 11월 21일 밤 임창열 경제부총리는 기자회견을 열고 “국제통화기금(IMF)에 유동성 조절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12월 3일 임 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IMF 자금 지원 합의서'에 서명했다.
2001년 8월 구제 금융 자금 전액 상환으로 IMF 관리 체제를 벗어나기까지 우리 경제는 큰 변화를 겪었다. 이때의 노력을 기반으로 지난 20년 동안 우리 경제는 상전벽해 수준의 성장을 했다. 2016년 외화보유액은 1997년의 40배 수준인 3711억달러였다. 코스피지수는 1997년 말의 6배 수준인 2500을 오갔다. 당시 100억달러 적자이던 경상수지는 올해 1~9월 900억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우리 경제가 “20년 전과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이대로 괜찮다”고는 하지 않는다. 우리 경제는 '저성장 늪'에 빠졌다. 기업은 새로운 먹거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외환위기 때 생겨난 비정규직 문제는 심화되고 있다. 20년 전 그때처럼 경제 체질 전면 대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괄목할 경제 지표 개선
IMF 외환위기 때 우리 경제 상황은 주요 지표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996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7.0%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듬해 4.7%를 보인 후 1998년에는 -6.9%를 기록했다. 1996년 2.0%이던 실업률은 1997년 2.6%, 1998년 7.0%로 급상승했다. 실업자는 1997년 56만8000명에서 1998년 149만명으로 3배 가까이 늘었다.
지난해 발간된 '코리안미러클4:위환위기의 파고를 넘어'는 당시 상황을 “1997년 말 30대 대기업 그룹 가운데 8개를 포함한 1만7000여 회사가 연쇄 도산했다”면서 “거리엔 실업자가 넘쳐 났고, 외화 유동성 부족으로 건국 이래 사상 최악의 국가 부도 사태를 맞았다”고 묘사했다.
1997년 구제 금융의 직접 원인이 된 외화보유액은 89억달러 수준이었다. 외화보유액 대비 만기 1년 미만의 단기 외채 비중은 286.1%를 기록했다. 1년 이내에 갚아야 하는 빚이 실제 갖고 있는 돈보다 거의 3배 많았다는 의미다. 1997년 경상수지는 102억8500만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경제 지표는 눈에 띄게 개선됐다.
외화보유액은 지난해 기준 3711억달러다. 1997년의 41배 수준이다. 1~9월 경상수지는 933억8000만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국가 신용 등급도 많이 올랐다. 1997년 국제 신용평가기관 S&P·피치·무디스는 한국 등급을 각각 B+, B-, Ba1로 평가했다. 지금은 각각 AA(11계단 상승), AA-(12계단 상승), Aa2(8계단 상승)로 제시했다.
주요 경제 지표를 근거로 정부는 20년 전과 지금이 “전혀 다르다”고 평가한다.
고형권 기획재정부 1차관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20년 전과는 펀더멘털에 큰 차이가 있다”면서 “1997년 외환위기 때는 경상수지 적자가 계속됐고, 대외 건전성이 취약하고 기업 재무 구조가 나빴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말했다.
◇경제 체질은 여전히 '허약'
경제 전문가들도 우리 경제 체력이 개선됐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체질'은 여전히 허약하다고 지적했다.
우리 경제는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제조업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주요 수출 품목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역대 정부가 규제 개혁을 외쳤지만 여전히 현장에서는 겹겹이 쌓인 규제 때문에 신사업 진출을 포기하고 있다.
대기업은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국내 30대 그룹이 쌓아 둔 사내유보금은 70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런 구조는 '저성장 고착화'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2013년 2.9%, 2014년 3.3%, 2015년 2.8%, 2016년 2.8%를 각각 기록했다. 올해 반도체 시장 호황에 힘입어 3%대를 회복할 것으로 기대되지만 내년에는 다시 2%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IMF는 해결 방안으로 구조 개혁을 주문했다.
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한 IMF 미션단은 시스템 개혁을 강조하며 “구조 문제는 견조하고 지속 가능한 장기 성장으로의 복귀를 저해하고 있다”면서 “한국 잠재성장률은 1990년대 초반 7%에서 3% 이하로 하락했다”고 진단했다.
◇'젊은 기업'이 없다…중장기 과제도 '첩첩산중'
IMF 외환위기를 맞아 금융·기업 전면에 걸친 구조 조정이 이뤄졌다. 방만 운영돼 온 기업들은 허리띠를 졸라맸고, 그 결과 기업 건전성은 크게 개선됐다. 그러나 우리 경제의 변화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야 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우리 경제는 대기업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 수출에서 대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62.2%다. 중견기업은 17.7%, 중소기업은 19.8%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전체 기업에서 차지하는 중소기업 비중이 99.88%인 점을 고려하면 크게 낮은 수치다.
새로운 대기업 탄생이 더디다 보니 경제 활력도 떨어지는 것이 문제로 지적됐다. 외환위기 이후 벤처 바람을 타고 신생 기업들이 다수 탄생했지만 대기업 반열에 올라선 사례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네이버, 카카오, 넥슨 등이 대표 사례로 꼽힌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는 '최근 경제 현안에 대한 전문가 제언'에서 한 컨설팅 업체의 의견을 인용해 '젊은 기업' 지원을 강조했다.
이 컨설팅 업체는 “혁신하지 않는 늙은 기업 보호에 정부 정책의 초점이 맞춰진 듯하다”면서 “잠재력 높은 어린 기업이 성장 궤도에 올라서도록 정책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밝혔다.
노동 문제와 저출산·고령화 등도 우리 경제 체질을 약하게 만드는 것으로 지적됐다.
IMF 외환위기로 확산된 비정규직 문제는 끊임없이 우리 사회의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6년 43.2%이던 비정규직 비율은 1997년 45.7%, 1998년 46.9%, 1999년 51.6%, 2000년 52.1%로 높아졌다. 올해 8월 기준 비정규직 비율은 32.9%다.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 설문에 따르면 국민 대다수가 외환위기가 우리나라에 미친 가장 큰 영향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꼽기도 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저출산·고령화 문제도 시급한 해결 과제로 꼽혔다.
출생아 수는 올해 40만명대가 무너지고,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내년부터 감소할 전망이다. 8월 기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14.02%를 차지, 우리나라는 이미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산업연구원은 생산가능인구 비율이 0.1%포인트(P) 감소하면 국내총생산(GDP)이 0.30%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면서 “인구 구조의 급격한 변화는 우리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크게 저하시킬 가능성이 짙다”고 분석했다.
유선일 경제정책 기자 ys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