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포스트 PBS, 이제 실전…정부, 예산으로 물꼬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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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이 일대 기로에 섰다. 그동안 현장을 지배해 온 연구과제중심운영제(PBS)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의다.

PBS는 인건비를 비롯한 예산 배분, 연구 사업 평가·관리를 과제 중심으로 운영하는 제도다. 과제를 더 많이 수행하고, 성공시킬수록 더 많은 혜택을 받는다. 우리나라가 빠르게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서 선진국을 추격할 수 있는 데 기여했다.

최근 PBS의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부각되면서 정부가 PBS 기반 예산, 평가, 관리 체계 전반을 손볼 태세다. '추격형' 과학기술 정책이 한계에 부닥쳤다고 판단한 것이다. 과학기술 수준이 선진국에 근접하면서 남을 따라잡는 것을 넘어 남보다 앞서가는 '선도형' 전략이 필요하다.

PBS가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더 많은 과제, 성공 가능성이 짙은 과제 수행 중심에서 앞으론 실패 위험이 있더라도 도전성 및 창의성 강한 연구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결 조건은 '연구 환경 안정화'다. 과제 수주가 아니라 연구 자체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정부는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예산부터 수술대에 올렸다. 예산은 연구기관 운영의 토대다. 예산이 들쭉날쭉하면 안정된 연구 환경 조성은 어렵다.

PBS 체계에서는 과제를 수행하는 만큼 예산을 얻는다. 반대로 과제 수주가 저조하면 예산이 줄어든다. 기관 고유의 연구보다 많은 과제를 수주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내년도 출연연 인건비 가운데 정부출연금 비중을 높인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예산 가운데에서도 연구 활동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인건비를 '포스트 PBS' 첫 타깃으로 삼았다. 출연 인건비 비중이 높아지면 과제 수주와 상관없이 연구자 활동을 보장할 여력이 커진다.

출연연 인건비는 크게 정부가 쥐어 주는 출연 인건비와 민간·정부 과제를 수주해서 따내는 '수탁과제비'로 나뉜다. 수탁과제비가 이른바 'PBS 예산'에 해당한다. 출연 인건비는 '안정된 인건비'로 분류된다. 수탁과제비는 출연연이 연구 인력 운용을 위해 과제 수주에 매달리게 하는 PBS의 핵심 고리다.

정부 목표는 출연연의 안정된 인건비 비중을 70%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PBS 인건비 비중은 20~30%대로 낮춘다. 현재 출연 인건비 비중이 70%에 못 미치는 12개 기관 가운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한국건설기술연구원, 한국철도기술연구원, 한국표준연구원,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등 6개 기관이 우선 대상이다.

PBS 개선 요구가 가장 강하게 제기된 기관을 우선 적용 대상으로 삼았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한국원자력연구원,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제외했다. 이들 기관은 해당 기관만 수행 가능한 '지정 과제'를 수주하는 경우가 많다. 현 체계에서도 기관 임무가 다소 명확하고, 과제비 액수도 높다. PBS 역기능이 덜하다.

내년도 출연연 예산안은 '포스트 PBS' 측면에서 기존보다 진전됐다. 출연연의 안정된 인건비 상향 노력은 지난 정부에서도 계속됐다. 이 덕분에 이미 인건비에서 차지하는 출연금 비중이 70%를 웃도는 기관이 25개 출연연 가운데 10곳에 이른다. 그러나 그동안 전체 출연금에서 연구비 비중을 줄여 인건비를 늘리는 경우가 잦았다. 이 경우 전체 예산의 안정성은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

정부는 이번에 출연금 자체를 늘리는 방식을 택했다. 출연 인건비가 늘어나도 직접 연구비가 줄어들 우려는 없다. 늘어나는 예산이 고스란히 안정된 연구 활동에 쓰일 수 있다. 'PBS 전면 폐지'까지 주장해 온 연구계는 환영하는 분위기다. 인건비뿐만 아니라 전체 예산의 안정성이 향상되길 바라는 목소리도 있다.

출연연 관계자는 “출연연 예산에서 출연금 비중이 높아지는 것은 그만큼 '기관 고유 사업'에 집중할 수 있는 여력이 커진다는 것”이라면서 “마구잡이식 과제 수주, 과제를 위한 연구 행태는 줄고 출연연 본연의 임무에 맞는 연구 수행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정부 구상이 실현되면 바통은 출연연으로 넘어간다. 안정된 연구 환경에 맞춰 기관 임무를 명확히 하는 연구가 요구된다. 출연연은 과거 국가 발전을 주도했지만 민간 연구개발(R&D) 활동이 활발해진 지금 역할이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민간이 수행하기 어려운 실패 위험이 높은 연구, 원천 기술 개발 등이 대안으로 제시됐다. 포스트 PBS가 실현되면 민간과 과제 수주 경쟁을 벌이는 것보다 이런 활동에 집중할 수 있다. 그만큼 출연연에 대한 사회 요구와 출연연의 책임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송준영기자 songj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