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과제중심운영제(PBS)는 명문화된 규정이나 법률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을 관통한 '경향'이다. 1990년대 이래로 대부분 정책이 '경쟁해서 과제를 수주하면 더 많은 혜택을 주고, 과제의 성공·실패 중심으로 사업을 관리한다'는 PBS 틀 안에서 짜였다.
PBS 문제는 정부가 해결에 나선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의 인건비·예산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포스트 PBS' 체제가 정착되려면 경쟁과 과제 중심으로 획일화된 사업 관리·평가 체계 전반을 혁신해야 한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지난 8월 29일~9월 8일 연구자 및 연구관리자 494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를 보면 PBS 체계의 연구 관리제도 한계가 명확히 드러난다. 연구계는 연구 몰입을 방해하는 행정 비효율 부담을 크게 느꼈다.
연구자는 연구 목표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했지만 현실에서는 감사 대응과 자료 제출에 어려움을 겪었다. 개별 과제 위주로 세세한 관리가 이뤄지다 보니 비효율 규정이 양산되고 연구 환경이 관료화된 탓이다.
문재인 정부가 '자율과 책임의 과학기술 혁신 생태계 조성'을 국정 과제로 내세웠지만 응답자의 63%가 이를 모르고 있었다. 이 같은 국정 과제 달성을 위해 우선 수행해야 할 과제로 '연구자 편의를 위한 행정 효율화'를 꼽은 비율이 45.1%로 가장 높았다.
정부가 역점을 두는 과학기술 컨트롤타워 강화는 23.1%로 후순위였다. 그만큼 행정 부담을 크게 느낀 것이다. 기존의 제도·규정 때문에 연구 과정에서 불편함을 느낀 경험을 묻는 문항에는 절반 가까운 47.8%가 '연구비 지급 및 관리'라고 답했다. 결과 보고 평가, 사업 실적 보고, 정산은 20.4%가 불편을 토로했다.
이는 PBS 체계에서 과제 단위 관리, 감독이 강화된 탓이 크다. 부처별로 흩어진 연구관리규정이 120개가 넘는다. 일부 기관은 감사 지적을 우려해 상위 규정에 근거가 없는 세부 관리 지침을 마련한다.
이러다보니 연구자 인식이 역전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KISTEP 설문에서 연구자가 책임감을 느끼는 1순위 업무는 '연구 목표 달성'이었다. '감사 대응'은 7순위로 가장 낮았다. 그러나 어려움을 느끼는 순위는 정반대였다. 감사 대응이 가장 높았고, 연구 목표 달성은 가장 낮았다.
경직된 평가 체계도 개선 과제로 지적됐다. PBS 체계에선 과제의 성공·실패를 판정하고, 연차별로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게 평가의 주류다. 연구자가 성공 가능성이 엿보이는 보수성 강한 연구에 몰두하게 한다. 연차 협약에 따라 과제 중간에도 다시 협약을 체결해야 한다.
정부도 연구개발(R&D) 프로세스 혁신 정책에서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연구 과정 중심으로 평가 방법을 바꾸고, 분야 특성에 따라 성공·실패를 판정하지 않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연차 협약 대신 다년도 일괄 협약을 체결하고, 중간 점검에서 목표 수정을 허용한다.
송준영기자 songj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