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의료심사평가 DNA가 개발도상국, 저개발국가에 이식된다. 40년간 건강보험제도 구축·운영 노하우를 집대성한 '의료심사평가 매뉴얼'이 그 주인공이다. 눈부신 성장을 거둔 의료심사평가 체계를 벤치마킹하려는 국가가 줄을 잇는다. 조직구성부터 심사평가 업무, 정보통신기술(ICT) 인프라 구축, 결과 분석 등을 담은 의료심사평가 체계가 세계 곳곳으로 확산된다.
◇세계 건강보장 확대, “한국 벤치마킹하자”
최근 세계 보건의료 전문가가 모인 'JLN(공동학습네트워크) 국제콘퍼런스'가 개최됐다. JLN은 보편적 건강보장 달성을 목적으로 국가 건강보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기 위해 2010년 설립된 국제네트워크다. 30억명 이상 세계인에게 건강보장을 확대하고 재정을 보호하는 비전을 세웠다. 행사에서 JLN 15개 회원국 보건부와 건강보험청, 세계은행 등 소속 전문가 90여명이 우리나라를 찾았다.
화두는 세계 최초 선보이는 '의료심사평가매뉴얼'이었다. 2015년 JLN은 우리나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 매뉴얼 개발을 위한 '의료심사평가협의체' 주관을 요청했다. 심평원 주도로 가나, 인도, 케냐 등 8개국이 힘을 합쳐 2년간 개발한 매뉴얼이 이날 공개됐다.
◇의료심사평가 '교과서', 한국이 표준 정립
의료심사평가매뉴얼은 40년 건강보험제도를 운영한 노하우를 고스란히 담았다. 작년 3월부터 원주 심평원 본원에서 의료심사평가협의체 간 3차례 대면회의를 거쳤다. 우리나라 사례를 중심으로 △효과적 의료심사평가체계 구조와 절차 △국가별 심사평가체계, 도전과제 △세부내용 학습 매뉴얼 재검토 과정을 밟았다. 전체 참여자와 외부 전문가 감수를 거쳐 약 2년 만에 공개됐다.
145페이지 분량 매뉴얼은 총 4장으로 구성된다. 각 장별로 심사평가 체계 구축·운영 지침과 함께 표본으로 심평원 사례를 첨부했다.
1장 개요는 매뉴얼 목적과 구성, 개발주체, 의료심사평가체계 틀, 정의를 소개한다. 2장은 심사평가체계 구조를 담았다. 의료심사평가를 수행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효과적 거버넌스, 수행기관 조직체계, 인적자원 역량 개발을 포함한다. 3장은 심사평가체계 과정을 제시한다. 심사평가를 위한 지표개발, 기준 설정과 이상치 감지 시 수행하는 활동, ICT 시스템 개발을 다룬다. 마지막 심사평가체계 결과 부문에서는 결과 공개, 정책반영, 효율적 재정지출관리 성과, 의료서비스 질 향상을 상세히 소개한다. 심사평가 정의부터 조직구성, 효율적 운영, 본연 업무, 결과물 활용까지 전 영역을 하나의 매뉴얼에 담았다. 우리나라 건보제도 발전 씨앗이 된 ICT 인프라까지 제시해 핵심 노하우도 전수한다.
정영애 심평원 국제협력단 부장은 “매뉴얼은 심사평가 전 과정에 구조적으로 필요한 요소와 결과 도출, 활용 등을 망라해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면서 “우리나라 건강보험제도 경쟁력인 ICT 인프라와 활용 중인 프로그램까지 설명해 건강보험제도 구축을 추진 중인 국가에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게 돕는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도 의료심사평가 체계를 매뉴얼로 정리한 사례는 없다. 세계 최초로 개발된 이번 매뉴얼은 심사평가체계를 도입하거나 개선하려는 국가가 성과를 도출하도록 구체적 내용과 실용적 기술방법을 제시한다.
개도국과 저개발국가 관심이 뜨겁다. 개발에 참여한 인도, 가나, 나이지리아, 필리핀 등은 적용을 검토한다. 대부분 건강보험 보장률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개도국이다. 체계 구축을 위한 컨설팅, 인프라 설계·도입 등 상당한 비용을 아낄 수 있다. 우리나라 건강보험심사평가체계는 이미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는다. 이를 기반으로 만든 매뉴얼도 제작 과정을 월드뱅크(WB), 세계보건기구(WHO), 빌앤멜린다게이츠재단, 록펠러재단 등이 후원하면서 신뢰성을 갖춘다.
정 부장은 “콜롬비아, 가나, 필리핀, 인도 등 개발에 참여한 국가 대부분이 의료심사평가매뉴얼 도입을 검토한다”면서 “JLN과 논의해 시장·국가별 업데이트 사항을 신속하게 반영하고, 개도국이 효율적으로 적용하도록 교육지원을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심사평가 HW 이어 SW까지…의료한류 점화
글로벌 의료심사평가매뉴얼 개발을 우리나라가 주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세계적 벤치마킹 대상인 건강보험제도가 있다. 1977년 1월 국내 최초 5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시작된 의료보험은 1989년 전 국민 의료보험 시대를 열었다.
심평원은 건강보험 요양급여비용 심사와 급여 적정성을 평가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의료비용 관리와 서비스 질을 관리하는 핵심 업무를 맡았다. 효율적 업무처리, 대국민 서비스 고도화를 위해 ICT를 선택했다. 전자문서교환방식(EDI)을 이용한 전자심사청구 체계 구축을 시작으로, 의약품모니터링시스템(DUR), 차세대 건강보험심사평가시스템(HIRA 플러스) 개발은 세계 수준 의료심사평가국으로 발돋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ICT 기반 전 국민 건강보험 시대를 열면서 빅데이터 축적이 가능해졌다. 40년간 축적한 국민건강, 진료정보만 2조8000억건에 달한다. 행정자치부, 기상청, 질병관리본부, 국립중앙의료원, 통계청과도 데이터를 연계한다. 국민 맞춤형 건강관리, 의료비 심사평가 체계 고도화, 보건의료산업 지원 등에 활용한다.
HIRA 시스템은 3월 바레인에 사상 처음 수출하며 우수성을 입증했다. 총 155억원 수출 계약을 체결, 우리나라 보건의료 분야 전자정부 수출 신호탄을 쐈다. 최근 이란 정부와도 도입을 전제로 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HIRA 시스템이 우리나라 의료심사평가 인프라 우수성을 알렸다면, 글로벌 의료심사평가매뉴얼은 근간이 되는 프로세스 역량을 세계에 전파하는 사례다. 전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HW(HIRA 시스템)에 이어 SW(의료심사평가매뉴얼)까지 세계에 확산할 채비를 마쳤다. 의료기관, 의약품, 의료기기 등 연관 산업 동반진출 파급효과도 크다. 우리나라 보건의료 분야 노하우를 무상으로 공유한다는 점은 국제사회 기여하는 계기가 된다.
황의동 심평원 개발상임이사는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은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우수성을 인정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면서 “근간이 되는 의료심사평가체계를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면서 구축하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전자신문 CIOBIZ] 정용철 의료/SW 전문기자 jungyc@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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