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유공자는 우리나라 교육과 과학·산업기술 인프라 구축에도 이바지했다. 후세 연구자의 터전을 닦은 유공자가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나라의 과학강국 진입이 가능했다.
고 김동일 서울대 교수는 같은 학교 공과대학 초대, 3대 학장을 맡아 우리나라 공학교육 초석을 다졌다. 설립 초 혼란 속에서도 교수진을 확보하고 좌우 대립에 의연하게 대처했다. 과총, 대한화학회,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등 정부와 학계를 넘나들며 실학 정신을 지켰다.
보건학을 국내 도입한 권이혁 서울대 명예교수는 의학 교육에도 새 지평을 열었다. 일제시대 교육을 답습하던 1970년대에 통합교과목을 신설하고 교육자 연수 체제를 개발했다.
고 이재성 서울대 명예교수는 일본식 응용화학이 주류이던 시절 우리나라에 서양식 화학공학 교육 과정을 도입했다.
조완규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국인 출생성비, 유전형질, 포유동물 난자성숙 등 발생생물학을 개척했다. 조 교수가 36년 간 배출한 '설랑 문하생'이 지금도 국내외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발생학 연구를 주도한다.
문화재로 등록된 우리나라 최초의 아날로그 컴퓨터 '연세 101 아날로그 전자계산기'는 고 한만춘 연세대 명예교수 작품이다. 전력 계통 안정도 개선, 제어기 개발, 원자력 발전 안정성 연구 등 다방면에 활용됐다.
고 김수지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국내 최초의 간호학 박사로, 간호 현장 기틀을 잡았다. '사람 돌봄 이론'을 개발하고 지역사회에 방치된 만성정신질환자를 보듬었다. 간호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국제간호대상을 수상했다.
고 안동혁 한양대 명예교수는 해방 직후 산업기술 기반을 닦은 화학공학자다. 일제 강점기부터 유지 연구와 공업용수 조사에서 성과를 냈다. 광복 후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재건하고 중앙공업연구소를 재편했다.
고 최순달 KAIST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 우리별 1~3호 발사 성공을 이끌었다. 시분할전자교환기(TDX) 개발을 주도해 '1가구 1전화' 시대를 열었다. 1992년 우리별 1호 발사는 후발국인 우리나라가 위성 강국으로 성장한 시발점으로 평가된다.
고 최형섭 박사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설립, 대덕연구단지 조성, 한국과학재단 설립을 주도하며 과학기술 발전사에 한 획을 그었다. 1971년부터 7년 반 동안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냈다. 1988년 유엔과학기술개발기구 자문위원으로 선출됐다.
고 윤일선 서울대 명예교수는 1930년 조선의사협회 결성을 주도했다. 최초의 우리말 학술지인 조선의보를 창간하고 첫 편집인을 지냈다. 조선의보가 1938년 손기정 선수의 혈액검사 결과를 게재했다는 이유로 폐간될 때까지 일제 치하 한국인 학자의 활동과 모임을 주관했다.
송준영기자 songj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