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1928년 영국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지 90주년이 되는 해다. 당시만 해도 사망 원인 1위는 감염이었다. 변변한 치료약도 없는데다 청결하지 못한 환경 탓에 결핵, 홍역, 말라리아, 폐렴 등 감염병 발생 시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맞았다. 면역력이 약한 신생아는 특히 취약했다. 1890년 미국 볼티모어 지역 신생아 1년 내 사망률은 70%에 달했다.
페니실린은 인류를 구원할 생명줄과 같았다. 20세기 최고 발명품으로 꼽히는 페니실린은 인류 삶을 완전히 바꿨다. 평균 수명이 향상되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영역이 발전했다. 세균을 정복하면서 제약 산업이 꽃 피웠고 전 산업 영역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컸다.
페니실린 발견 90년이 지난 지금 인류는 또 다른 세균과 싸운다. 항생제 오남용이 만연하면서 내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항생제 내성균, 일명 '슈퍼박테리아'가 탄생했다. 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해 각국 보건당국은 슈퍼박테리아가 인류를 위협할 요소로 지목, 초국가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항생제 '역습'이 시작됐다.
◇'행운'이 낳은 세기의 발명, 페니실린
페니실린 발견은 행운이었다.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은 포도상구균을 기르던 접시를 배양기 밖에 둔 채 휴가를 다녀왔다. 휴가에서 돌아온 플래밍은 푸른곰팡이가 접시 위에 자라 있고, 곰팡이 주변 포도상구균이 깨끗하게 녹아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 곰팡이는 아랫층에서 곰팡이를 연구하던 라투슈의 실험실에서 올라온 것이었다.
플레밍은 이 곰팡이가 포도상구균 발육을 억제하는 것을 확인했다. 곰팡이가 속한 페니실리움 이름을 따 페니실린으로 이름 붙였다. 페니실린은 포도상구균 외 연쇄상구균, 뇌수막염균, 임질균, 디프테리아균 등 인간과 가축에 전염병을 일으키는 병원균에도 효과가 있었다.
◇페니실린 대량 생산시대, 삶을 바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했지만 상용화는 실현하지 못했다. 효과가 30분도 채 지속되지 못한데다 약품으로 정제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곰팡이를 직접 인간에게 주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39년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플로리와 유대계 독일인 체인은 미국 록펠러 재단 후원으로 페니실린 연구에 착수했다. 반년 간 연구를 거쳐 페니실린을 정제하는데 성공했다. 동물실험 성공 후 1941년 인간 대상 실험도 성공했다. 본격 상용화가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다. 전쟁 부상자 치료를 위해 대량 생산을 시작했다. 1944년 민간에도 보급돼 수많은 전염병 환자 목숨을 구했다.
페니실린 영향은 거대했다. 감염에 의한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떨어뜨렸다. 실제 페니실린이 개발되기 전 1900년대 인간 평균수명은 36세에 불과했다. 영유아 절반이 10세가 되기 전 사망했다. 상용화가 된 1950년대에는 52세까지 뛰었다. 지난해 평균수명은 80세를 돌파했다. 감염에 취약했던 신생아와 아프리카 등 후진국에서 효과는 더 컸다.
페니실린이 없었다면 현재 인구 수가 절반 이하일 것이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영국문화원이 세계 1만명에게 최근 80년간 세계를 바꾼 발명을 조사한 결과 페니실린은 '월드와이드웹(www)'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제약산업은 페니실린 계기로 본격 성장했다. 세계적 제약사 화이자는 1930년대까지 비타민을 주로 생산했다.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 중 정부 요청으로 페니실린을 대량 생산했다. 1944년 노르망디에 상륙한 페니실린은 수백만명의 부상자를 살렸다. 화이자는 이를 전환점으로 세계 최고 제약사로 도약했다.
항생제 개발을 시작으로 인류가 바라보는 질병 관점이 바뀌었다. 사망원인 1위 '감염'이 어느 정도 해소되면서 암을 비롯해 치매, 당뇨, 후천성면역결핍증 등 다른 질병 치료제 개발이 활기를 띄었다.
◇페니실린의 역습, 또 다른 세균 공습
페니실린을 시작으로 1970~1980년대 항생제 황금기가 열렸다. 1980년대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은 신규 항생제는 40개에 육박했다. 1990년대 들어 항생제가 들지 않는 세균이 발견됐다. 페니실린 개량으로 만들어진 메타실린은 마티실린내성황색포도알균 출현으로 무력화됐다. 반코마이신이 대체재로 이용됐지만 반코마이신내성장알균이 등장했다. 황색포도알균 95%는 이미 페니실린에 내성을 보일 정도로 빠르게 진화한다.
2010년 들어 인도에서는 뉴델리 메탈로 베타락타아제를 가진 슈퍼박테리아가 등장했다. 2015년 중국에서는 최후 항생제로 불리는 폴리믹신 계열 항생제 콜리스틴에 내성을 갖는 유전자 MCR-1이 식용 돼지에서 발견돼 충격을 줬다. 작년 4월에는 미국에서 MCR-1 인간 감염 첫 사례가 보고됐다.
병원에서 장기간 입원하는 중증 환자는 카바페넴내성장내세균속균종(CRE) 감염에 취약하다. 미국 병원에서 CRE에 오염된 내시경 장비로 환자 감염이 발생해 사망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지난해 질병관리본부 감염병웹통계시스템 CRE 신고건수는 4958건에 달한다. 표본 감시 시작 후 5년간 90배나 증가했다.
기존 항생제는 박테리아 생존에 필수적 신호나 대사과정을 저해한다. 내성균은 기존 항생제 작용기전을 회피해 사람 몸속에 우점종으로 남는다. 신규 항생제를 개발해도 기존 약품과 같은 작용기전을 갖는다면 효과가 없다.
2016년 영국 정부가 발표한 '항생제 내성균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약 70만명이 슈퍼박테리아로 사망한다. 대응이 이뤄지지 못하면 2050년에는 3초에 1명이 사망할 것으로 경고했다.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소로 슈퍼박테리아를 지목했다.
우리나라 상황은 더 심각하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6년 기준 한국인 항생제 소비량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1000명당 하루 34.8명이 항생제를 처방 받았다. OECD 국가 평균 1.6배다.
막연한 항생제 믿음과 의료기관의 무분별한 사용이 원인이다. 작년 7월 질병관리본부가 의사 86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항생제가 필요하지 않지만 처방한 사례 중 36.1%는 '환자 요구' 때문이었다. 감기로 병원을 찾는 환자 중 최대 절반이 항생제를 원한다.
◇슈퍼박테리아 대응, 지구촌 과제
2015년 5월 WHO는 항생제 내성 대응방안을 담은 결의문을 채택, 각국 관심을 촉구했다. 항생제 내성 이해와 인식개선 △감시와 연구로 지식 강화 △감염사고 발생 감소 △적절한 항생제 사용 △항생제 내성 모니터링 시스템 구축 등 다섯 가지 전략을 제시했다. 작년에는 신규 항생제 개발이 시급한 내성 병원균 12종을 발표했다. 아시네토박터균, 농녹균, 황생포도상구균, 캄필로박터종, 폐렴구균 등이 대표적이다.
2011년 유럽연합은 'EU 액션 플랜'을 발족했다. 새로운 항생제 개발을 위한 NB4BB(New Drugs for Bad Bugs)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2014년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항생제 내성 관리를 위한 국가 전략을 발표했다. 미국 감염학회 중심으로 2020년까지 신규 항생제 10종 개발을 추진한다.
우리나라도 2003년 식품의약품안전처 주관으로 10년 장기 국가 항생제 안전관리사업을 추진했다. 제2차 국가 감염병 위기 대응 기술개발 추진 전략을 발표, 2017~2021년 항생제 내성 진단법과 치료제를 개발한다.
2016년 기준 세계 항생제 시장은 약 416억달러(약 50조원)다. 국내 시장은 1조3000억원 수준이다. 내성균 빈도가 점점 증가하면서 슈퍼박테리아 항생제 시장도 확대된다. 데이터모니터에 따르면 주요 선진국 항생제 시장은 2~3% 성장률이 예상된다. 슈퍼박테리아 항생제 시장은 연간 4~10% 가까이 성장한다.
기존 항생제 작용원리에서 탈피, 새로운 방법이 시도된다. '항생제 내성 극복을 위한 항독성제 연구 개발 동향'에 따르면 △제균 대신 세균 독성을 저해하는 항독성 △나노물질을 활용해 제균 △박테리아 감염 파지를 이용한 생물학적 치료법 △독소나 세포막 주요 독성인자에 결합하는 항체를 이용하는 게 대표적이다. 실제 클로스트리디움 보툴리눔 세균, 탄저균 등 세균 항체 치료제는 FDA 승인을 받아 사용 중이다. 황생포도상구균 독소 대상 치료제는 임상2상 중이다.
시장은 확대되지만 국내 제약사 움직임은 소극적이다. 개발 기간이 긴데다 항암제 등과 비교해 약가 책정이 낮게 됐다. 단순 항생제가 아닌 내성균 대응 가치가 수가에 반영되지 않는다. 국내 제약사가 개발한 슈퍼박테리아 치료제가 없는 이유다. 내성 항생제 환자를 치료할 2차 병원, 요양병원도 전무하다.
손장욱 고려대 안암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항생제 노출이 심해지면서 오히려 세균에 취약한 문제가 발생했다”면서 “개인 질병 문제에서 벗어나 국가적 보건문제로 인식, 신규 항생제 개발에 정부 R&D를 확대하고 내성 항생제 환자를 치료할 시설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자신문 CIOBIZ] 정용철 의료/SW 전문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