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노동부가 입법 예고한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은 반도체뿐만 아니라 디스플레이, 화학 등 산업계 전반에 걸쳐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영업비밀로 보호해 온 기업 핵심 기술이 중국 등 해외로 빠져나갈 수 있다. 이 법에 대한 논란이 산업 각 분야에서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고용부는 지난달 9일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을 급작스럽게 입법 예고했다. 통상 개정안을 내놓기 전에 각계의 의견을 청취하고 이를 반영하는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산업계에선 기습 입법 예고라는 비판도 거세다. 입법 예고 기간이 끝났음에도 시행령, 시행 규칙 등 하위법령 개정안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도 이를 방증한다고 입을 모은다.
입법 예고 기간에 간담회나 공청회도 이뤄지지 않았다. 입법 예고 기간이 지나고 일주일 뒤에 한 차례 형식에 그친 공청회가 열린 것이 전부다.
산업계 관계자는 “의견을 듣지 않고 반드시 통과시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평가했다. 입법 예고를 졸속으로 한 탓에 관련 업계에서도 이 같은 전부개정안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아예 이런 법이 없는 외국으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장 등 첨단 기술 기업을 이전하는 게 낫다는 의견도 나온다.
현실화할 수 없는 내용이 개정안에 포함돼 있는 것도 문제다. 한 예로 모든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고용부에 제출하고, 고용부는 제출받은 자료를 전산으로 공개하는 것이다. 이 자료에는 제조수입자 정보와 구성 성분 명칭 등이 포함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어떤 물질을 누구로부터 받아서 쓰는지가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고용부 산안법 전부개정안이 환노위 소속 더불어민주당 송옥주, 강병원, 신창현 의원이 발의해서 국회에 묶여 있는 의원입법안과 병합돼 통과될 수 있다는 점도 우려된다.
이 경우 현재 논란이 되는 역학 조사 결과 유해위협방지 계획서, 공정안전보고서 등 기업의 각종 기밀 자료 공개를 청구할 수 있게 된다. 이들 자료에는 작업환경측정보고서보다 더 많은 기업의 노하우와 기술이 집약돼 있다. 영업비밀 여부도 기업이 아닌 외부인 주축으로 구성되는 위원회가 결정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산업계 관계자는 “근로자 질병에 대해 업무 연관성 규명에 필요한 자료는 제공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산재 입증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거나 자료는 정보 공개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면서 “기업의 영업상, 기술상 비밀에 속한 사항도 적극 인정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업계에선 정부가 이미 방향을 정하고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김영주 고용부 장관은 국회의원 시절부터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를 타깃으로 무차별로 정보 공개 법안을 만들어서 발의하던 주인공이다. 이 법안은 아직 국회에 계류돼 있다. 반올림 측 주장에 힘을 보태 오던 박두용 한성대 교수도 지난해 말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을 맡았다. 산업안전보건공단은 산재 입증을 위한 역학 조사를 맡아서 하는 곳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백혈병 산재 소송을 이끌던 박영만 변호사는 올해 초 고용노동부 산재예방보상정책국장에 내정됐다.
정책 결정자가 모두 편향된 인사로 구성되면서 정책 방향은 민주 논의 과정 없이 사실상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