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이동통신 등 통신비 인하 '외풍'에 이력이 붙은 지 오래다. 정확한 시점을 특정할 수 없지만 대체로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통신비 인하 압박은 1996년 15대 총선 전후가 시발점이라고 한다. 2007년에는 사상 최초로 통신비 20% 인하가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제시됐다. 이후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통신비 인하 요구는 강도 높게, 집요하게 지속되고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기본료 인하와 가입비 폐지로 통신비를 인하하려 애썼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서민을 위한다는 명분은 그럴 듯 했지만 이용자가 체감하는 인하 효과는 미미했다. 통신비 지출 부담을 줄인다는 애초의 취지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선택약정 할인율 인상(20%→25%)을 시작으로 12월 저소득층 요금 감면 제도가 시행됐다. 올 하반기에는 기초연금 수급자(노령층) 대상 요금 감면이 예정돼 있다. 이뿐만 아니라 보편요금제 도입도 추진되고 있다.
공통점은 과거 정부와 마찬가지로 현 정부의 통신비 인하도 합당한 근거를 기반으로 한 게 아니라 일방통행이라는 점이다. 중도에 하차하긴 했지만 이통 기본료 폐지도 마찬가지다.
역대 정부가 이념 지향이나 경제 철학과 무관하게 하나같이 통신비 인하를 추진한 걸 감안하면 현 정부 행보를 이해 못할 바 아니다. 저소득층이나 사회 약자 배려 또는 지원을 위해 통신비 부담을 줄이는 데 딴죽을 걸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전과 다른 게 있다면 통신 정책 담당 부처 태도다. 그동안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잇따르는 통신비 인하 요구에 역대 통신 정책 담당 부처의 입장은 확고했다. 비난도 감수했다.
정보통신부, 방송통신위원회, 미래창조과학부 등 옛 통신 정책 부처들은 정치권과 시민단체 압박에 “인위 개입은 옳지 않다”면서 “시장 경쟁을 통해 통신비 자율 인하 유도가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용자뿐만 아니라 인프라와 산업 등을 두루 감안했기 때문이다. 통신비 인하 이후도 고려했다. 정치권 압박과 시민단체 비난에 부처는 이용자 부담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통사 투자 여력과 산업 경쟁력도 간과할 수 없다며 이통사에 버팀돌을 자처했다.
그런데 최근엔 역대 통신 정책 담당 부처가 주장한 자율 경쟁에 의한 요금 인하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아예 들리지 않는다. 현 정부 위세에 부처가 눌린 탓이라는 말이 회자된다. 강력한 외풍에도 그동안 이통사는 부처를 우군(友軍)으로 생각했고, 의지했다. '홀아비가 과부 사정 안다'는 옛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최근엔 부처에 대한 시각이 바뀌고 있다. 국정기획위원회보다 부처가 보편요금제를 강력하게 밀어붙인 게 결정타 역할을 했다. 오죽하면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을 실감한다고 한다.
일각에선 때리는 시누이가 등장했다는 자조 어린 말도 내뱉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통신 정책과 규제 철학 전반이 바뀌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일 정도다.
규제개혁위원회가 27일 보편요금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을 심사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말리는 시누이'보다 더 얄미운 '때리는 시누이'라는 오명을 떨쳐 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한다.
김원배 통신방송부 데스크 adolfkim@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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