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은 긴 침체기를 겪고 있다. 액정표시장치(LCD) 거래 가격이 지속 하락하고 있다. 중국 LCD 생산량이 증가해 공급이 시장 수요를 초과함에 따라 전에 없이 불황이 장기화될 우려가 커졌다. 정부의 든든한 지원을 바탕으로 LCD 기술력을 키운 중국이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에 적극 투자하고 마이크로LED, 퀀텀닷(QD) 등 차세대 신기술에도 적극 투자한다. 디스플레이 주도권이 한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갈 것이라는 우려는 어느새 현실이 됐다.
삼성전자에서 LCD총괄 사장을 역임하며 한국이 세계 LCD 시장을 재패하는데 주도 역할을 한 이상완 한양대 석좌교수는 “과거 한국이 일본을 추월한 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한국과 일본 간 격차가 벌어졌다”며 “한국도 중국에 선두자리를 내주면 다시 제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격차가 빠르게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하면 안 된다”고 우려했다.
이 교수는 LCD 시장을 사실상 개척한 주역으로 '미스터 LCD'로 불린다. 그가 생각하는 위기의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 해법은 무엇일까. 당시와 시장 환경이 많이 달라졌지만 과거 성공 경험에서 교훈을 얻고 현재 상황에 맞게 적용해볼 여지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상완 교수는 삼성전자가 세계 LCD 시장 1위로 올라서는데 핵심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1976년 반도체 엔지니어로 삼성전자에 입사한 뒤 1993년부터 LCD 사업부장을 맡았다. 이후 2008년까지 15년간 삼성에서 세계 최초 7세대 규격 기판 투자, 소니와 합작법인 투자 등 굵직한 전략을 이행하며 삼성의 디스플레이 기술과 사업 역량을 세계 수준으로 성장시켰다. 지난해까지 삼성전자 고문직을 역임하고 올해 비로소 '자유인'이 됐다.
이 교수는 최근 국제정보디스플레이학회(SID)에서 신설한 '데이비드 사르노프 인더스트리얼 어치브먼트상(David Sarnoff Industrial Achievement Prize)'을 받았다. SID는 주로 기술 엔지니어의 연구업적을 치하해 상을 수여하는데 올해 처음으로 기술 외 부문에서 디스플레이 산업 발전을 이끈 인물을 선정했다.
이 교수는 “한국 디스플레이 성장기에 참여할 수 있어서 굉장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실제로 1993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 LCD 산업은 다른 분야 산업을 통틀어 가장 큰 연평균 성장률(34%)을 기록했다.
그는 삼성이 LCD 시장 선두였던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서는 성공을 거둔 배경으로 △위험을 무릅쓴 적기 투자 △퍼스트 무버 전략 △공동 성장(Grow Together) 전략을 꼽았다.
디스플레이 시장은 2년 주기로 시장 활황과 침체를 반복하는 크리스탈 사이클을 겪는다. 시장 침체기에 투자해야 패널 수요가 급증해 공급부족이 발생하는 시기에 큰 이익을 낼 수 있다. 침체기에 투자를 꺼리면 공급이 부족한 활황기에 열매를 따먹을 수 없다. 침체기에 투자하는 것은 경영상 위험을 동반하지만 투자 후 2년 뒤에 돌아올 '달콤한 열매' 가치를 인식해야 한다고 봤다.
세계 최초 40인치 LCD 시제품 개발, 6세대를 건너 뛴 세계 첫 7세대 투자 등 기존에 아무도 하지 않은 시도를 결정하고 이행한 퍼스트 무버 전략도 효과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기술·시장 표준화를 한국이 주도하면서 장비·부품·소재 등 관련 후방기업이 함께 LCD 시장에 참여해 성장했고 결과적으로 세계 LCD 시장 파이를 함께 키워나가게 된 전략도 주효했다고 봤다.
이 교수는 “2005년 일본 '평판패널디스플레이 인터내셔널' 기조연설에서 2010년 LCD TV 시장 규모를 기존 전망치인 7000억대를 훌쩍 넘긴 1억대도 충분히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며 “실제로는 LCD TV 1억대 시장을 2년 앞당긴 2008년에 달성했는데 이는 산업 전반에 걸쳐 LCD 시장을 기업이 함께 키워나갔기에 가능했다”고 회상했다.
이 같은 과거 성공 방정식은 지금도 유효할까.
그는 “현재 디스플레이 산업은 다른 형태 도전에 직면했다”고 진단했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퀀텀닷(QD), 플렉시블, 마이크로LED, 자발광 QLED(퀀텀닷발광다이오드) 등 여러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다. 기술 난도는 더 높아졌다. 어떤 기술이 시장 승자가 될지 예측하는 게 과거보다 더 어려워졌다.
이 교수는 “시장 승자가 될 기술을 예측하는 게 더 어려워졌지만 지금도 '퍼스트 무버' 전략은 유효하다”고 말했다.
대신 한 가지 중요한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공격적인 목표를 설정했을 때 수반되는 위험을 관리하기 위해 과거보다 훨씬 정교하고 세분화된 위험 관리가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제한된 비용과 인력으로 모든 가능성 있는 기술에 투자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관련 기업 간 전략적 협업 필요성이 더 커졌고 협업을 잘 활용하는 전략이 미래 경쟁력에 더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삼성전자와 소니가 7세대 LCD 패널 생산을 위해 설립했던 합작법인 에스엘시디(S-LCD) 사례를 예로 들었다. 당시 이 교수는 막대한 투자비 때문에 7세대 설비 투자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소니와 합작법인 설립안을 놓고 TV 세트 부문은 경쟁사를 키워주는 효과를 상당히 우려해 반대했다”며 “하지만 LCD 사업 부문은 막대한 7세대 투자비를 혼자 감당하기 힘들었고 시장 확보도 어려워서 소니와 손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결과적으로 초기 LCD 시장을 키우고 양 기업이 모두 성장하는 성과를 거뒀다”고 말했다.
그는 “디스플레이 기술이 발전할수록 개별 기업이 감내할 막대한 투자 부담과 실패 위험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며 “이런 경영 위험 수위를 낮추면서 동시에 빠른 기술 개발, 시장 형성과 성장 등을 꾀하려면 유관 기업과 인수합병, 합작법인 설립, 투자 등 다양한 형태의 협업을 더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한국 기업은 혼자서 모든 기술을 개발해 갖추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이제는 각 분야 전문기업과 함께 일하는 게 훨씬 빠르고 효율적이라는 것을 경험했다”며 “앞으로 더 강력하고 밀접한 협업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 1위인 일본을 끌어내리고 한국이 1위로 도약하는데 기여했던 그는 최근 중국 디스플레이 굴기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이 교수는 “중국 성장세가 과거 한국이 일본을 추월했던 상황과 비슷해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일본을 처음 추월한 뒤 양국 간 격차가 빠르게 벌어졌고 결국 일본이 1위 자리를 되찾지 못했다”며 “한국이 중국에 1위 자리를 한 번 내주면 재탈환하기 상당히 어려워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이미 일부 영역에서 중국이 한국을 추월하기 시작했다”며 “늦었다고 생각될 때 뭐라도 하지 않으면 고사당하기 십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까.
이 교수는 “한국이 주도해 기술 경쟁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 이상 LCD로 경쟁해서는 승산이 없다는 뜻이다. LCD는 대형화 외에는 뾰족한 차별화 포인트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이런 점에서 볼 때 삼성·LG디스플레이가 일찌감치 OLED로 사업 방향을 돌린 게 유리한 결정이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전체 디스플레이 산업의 방향을 제시할 리더가 없어 전체 시장이 방향점을 잃은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기업이 차세대 기술 방향을 제시하면 장비, 재료, 부품 등 후방기업이 그 방향으로 움직이므로 개발에 5년이 필요한 기술을 2년으로 단축시킬 수 있다”며 “기업이 각자 다른 방향을 보면 전체 산업을 이끌지 못하므로 산업계 리더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최근 국내 패널사는 과거와 달리 리더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과거보다 경쟁이 더 치열해져서 최대한 정보를 숨기고 기업이 혼자 기술을 독점하려는 전략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후발주자는 선두를 따라잡기 위해 신기술도 먼저 제시하고 표준화도 열심히 주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지금은 기술을 표준화하면 경쟁사가 쉽게 기술을 채택할 수 있어 위협이 된다”며 “기술 장벽을 높고 두껍게 치면 일정 기간 동안 수혜는 누리지만 전체 산업이 성장하는 효과는 생기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또 “OLED 기술은 LCD와 완전히 달라서 아날로그 성격 기술, 인력, 경험이 중요해 소위 '블랙 텐트'를 치고 기술을 보호할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결국 LCD 기술이 성숙하듯 OLED 기술도 빠르게 성숙해져 후발과 격차가 좁아질 수밖에 없으므로 OLED로 차별화할 수 있는 시기에 최대한 차세대 투자 여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긴밀한 우군을 확보하려면 중국을 포함한 다양한 협력 대상과 방식에 대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 교수는 “한국이 초기 LCD에 투자할 때 일본에서는 한국에 장비·재료를 납품하면 기술이 유출되고 경쟁국을 키우게 된다며 걱정하는 목소리가 컸다”며 “현재 한국이 중국에 대해 우려하는 사안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또 “중국은 내수시장이 커서 한 가지 기술에 집중하면 전체 재료, 장비, 부품에 걸쳐 생산단가를 낮출 수 있고 공급량도 많아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키울 수 있다”며 “하지만 다른 나라는 추구하는 기술이 각기 다르면 고가에 생산할 수밖에 없어 경쟁력이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이에 덧붙여 “일단 기술 방향이 달라도 설비의 기본인 규격면에서는 대형화가 공통된 추세인 만큼 이 분야에서 기업 간 협력이 가능할 수 있다”며 “당장은 한국이 기술 장벽을 높게 쳐서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격차를 벌릴 차세대 기술을 개발하는 전략이 급선무”라고 진단했다.
배옥진 디스플레이 전문기자 witho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