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와 관련돼 잘못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현지에서 즐겨 찾는 갈치조림이 제주 토속 음식이라고 많이들 알지만, 틀린 생각이다. 조림 음식 문화가 없었던 제주에서 갈치조림은 관광객 요구로 만들어진 음식이다. 제주에선 조림 대신 지져먹었다. 고춧가루를 쓰는 음식이 없다는 것과 저장 음식 문화가 없어 김장김치를 담그지 않는다는 것도 생소하다.
'제주 해녀'에 대한 인식도 그렇다. 역사적인 문헌에선 원래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이들은 남성이었을 개연성이 크다. '성종실록'(1489년)에 나오는 '복작우'는 어업에 전업하면서 전복을 따던 남성을 지칭했다. '남천록'(1679년)에서는 '포작인(鮑作人)의 수가 대단히 많아서 족히 진상에 응할 수 있었고, 경신년(1620년) 이후로는 거의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전복을 따던 남성이 여성에 의해 대체됐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렇듯 제주여행에서도 단순히 바다와 산만을 찾는다면 여행 본연의 재미를 놓칠 수 있다. 음식이나 유배, 신화 등 다양한 테마 여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중 최근 부쩍 관심을 받고 있는 코스가 '서귀포 건축문화기행'이다.
'왜 서귀포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한라산 남쪽에 있으면서 태평양에 접한 서귀포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색다른 장소다. 일제 강점기에는 중국 침략을 위한 전초기지로 군사기지들이 구축됐다. 현재는 이국적이고 매력적인 경관과 접목한 상업자본에 의해 미술관과 박물관, 그리고 주거시설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유명건축가의 작품들이 자리잡으면서 '건축박물관'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제주대 김태일 교수는 “건축과 도시는 형태와 공간 기능을 통해 그 시대 사회 변화요인, 지역 제반조건과 동시대 사람의 삶을 반영하는 공동구현체이며, 역사적 산물”이라며 “이 같은 사회성과 역사성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제주의 마을과 건축이라 할 수 있다”고 평했다.
'서귀포 건축문화기행'은 건축학적으로 뛰어난 가치와 이야기, 제주의 특징을 담은 10개 코스를 안고 있다. 각 코스는 제주 전통 가옥을 비롯해 예술가의 집, 역사와 문화를 말하는 건축, 국내외 거장의 작품 등 다양하고 풍부한 건축 자원을 보여준다.
10개 코스는 ▶전쟁과 근대건축(남제주비행기 격납고) ▶추사 따라 가는 길 ▶녹차밭 기행 ▶이중섭과 예술가의 길 ▶한국 건축 거장(김중업, 정기용 등) ▶21세기 현대건축 ▶서귀포 영화촬영지 ▶목축과 건축 ▶제주 민속 탐방 ▶안도&아타미 등으로 구성돼 있다. 하나하나 모든 건축물이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어 가족 여행지로는 더할 나위없이 안성맞춤이다.
이중 8월에 찾아간 이중섭 거리에는 삼복 무더위에도 삼삼오오 찾아오는 가족 여행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총길이 1.9km 이중섭 행복길에서는 다수의 작품이 비치된 이중섭미술관을 비롯해 이중섭 거주지와 이중섭공원, 서귀포예술시장, 서귀포 관광극장을 둘러볼 수 있다. 네 식구가 피난와 11개월을 살았던 1.4평짜리 창고방은 피난살이의 곤궁을 엿볼수 있어 마음이 짠했다. 1997년 복원된 이 집에는 당시 집주인이 지금도 살고 있다.
제주민속탐방 코스의 제주성읍마을은 제주 옛 고을의 모습과 전통가옥의 특징을 둘러볼 수 있어 가봐야 할 곳이다.
제주 성읍마을은 현청 소재지 역할을 담당한 정의현의 도읍지다. 조선시대 제주의 행정, 군사, 교육의 중심지였다. 794.213㎡ 지정 보호 구역 안에 390채 제주 전통초가가 있다. 마을 한복판에는 천연기념물 제161호로 함께 지정된 1000년된 느티나무와 600년된 팽나무가 있다.
'제주추사관'이나 '알뜨르비행기 격납고'는 자녀와 함께 하는 여행이라면 역사공부도 겸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제주 추사관은 건축가 승효상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바탕으로 완성했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에 유배돼 있는 동안 추사체를 완성했고, 세한도를 그렸다. 세한도는 8년3개월이라는 추사의 외로운 귀양살이를 표현해낸 걸작이다. 끝없이 이어진 중국 문인들의 찬사의 글도 함께 볼 수 있다. 추념 공간인 추사홀이 지상과 지하를 이어주며, 임옥상이 조각한 추사 선생의 흉상이 있다.
'알뜨르 비행기 격납고'는 중일전쟁 때 주로 이용된 일본해군 공항기지였다. 격납고 20기중 하나가 무너져 19기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들은 일명 '빨간 잠자리'로 불린 '아카톰보' 폭격기를 숨겨 두기 위한 장소였다. 하지만 완공이후 일제가 무조건 항복하면서 목적대로 쓰이지는 않았다. 재일 한국인 건축가인 '이타미 준'이나 '안도 타다오' 등 거장의 건축도 다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 마치 한 송이 포도같아서 이름지어진 '포도호텔'이나 성서속 방주를 형상화한 방주교회(이상 이타미 준) , 섭지 코지와 연계해서 감상할 수 있는 글라스 하우스와 유민미술관(이상 안도 타다오)이 대표적이다. 성산일출봉을 조망하기 좋은 섭지코지는 오른쪽으로 해안절벽, 왼쪽으로 바람 부는 벌판을 가르며 걸을 수 있어 낭만적이다.
서귀포시 관광진흥과 관계자는 “서귀포시는 지난 2016년부터 전역에 산재한 제주의 전통과 역사, 이야기가 있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건축물과 국내외 건축가들의 작품 등에 대한 기초조사를 벌여 코스를 선정했다”며 “9월부터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한 여행상품도 나올 예정”이라고 밝혔다.
나성률 전자신문인터넷 기자 nasy23@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