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 대한변호사협회장은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故) 김규동 시인이다. 모더니즘을 표방하며 분단 극복을 지향하는 시 세계를 펼쳤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다. 어머니는 황해도 출신 실향민이다.
김 회장 집무실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생전에 남긴 작품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경기초등학교, 수송중학교,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총명한 머리로 서울대학교 법대에 들어갔다. 76학번이다. 다른 법대생들과 달리 행정고시에 도전했다.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포부 때문이다. 필기에는 합격했지만 면접에서 떨어졌다. 군부 독재에 대항하는 학내시위에 참가했다는 게 이유였다.
이후 사법시험을 봤다. 이번에도 면접에서 탈락했다. 그는 미국행을 택했다. 김 회장이 27살 되던 1983년이었다. 빈 호주머니를 한국고등교육재단 장학금으로 채우고 공부에 매달렸다. 미국 코넬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워싱턴대학교에서 해상법을 전공,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내 두 번째 외국대학 박사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미국에서는 5년간 머물렀다. 실용주의, 과학주의, 봉사주의, 시민의식과 같은 새로운 문화, 제도를 몸으로 흡수했다. 기득권을 거부하고 규제보다 자유, 도전에 익숙한 가치관을 정립했다.
미국 생활 도중 국내로 잠시 돌아왔다. 필기시험 합격 후 유예 받은 면접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다. 당시 송상현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가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아버지와 함께 김 회장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송 교수는 국제형사재판소(ICC) 초대 재판관이다. 2009년부터 2015년까지 ICC 소장을 지냈다.
결국 변호사가 됐다. 사법연수원 17기를 수료했다. 해상법 전문가로 활약하고 있다. 1991년 해양수산부 고문변호사가 됐다. 현재까지도 맡고 있다. KSS해운, 한국해운조합, 한국해양수산개발원 고문변호사이기도 하다. 1992년에는 법무법인 세창을 설립했다. 국내 최대 해상법 전문 로펌이다.
굵직한 족적도 남겼다. 태안 유류오염 사고, 아덴만 해적 사건을 자문했다. 세월호 사태 때는 유족 손해배상 지급 업무를 담당했다. 옥시 가습기 사건에도 참가했다. 변호사 1000명과 '징벌적 손해배상을 지지하는 변호사·교수 모임(징손모)'을 구성했다.
2017년 2월 대한변호사협회장으로 취임했다. 로스쿨 변호사, 여성변호사, 사내변호사로부터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임기는 2019년 2월 25일까지다. 청년변호사 일자리를 만드는 데 집중할 목표다.
최종희기자 choij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