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부터 한 달에 두세번 꼴로 에너지저장장치(ESS) 대형 화재가 국내에서 발생했다. 전국에 운영 중인 ESS는 약 1100개다. 올해 알려진 화제 사고만 14건에 달한다.
ESS 화재 사고 대부분은 배터리 혹은 배터리실에서 발생했다. ESS는 전기자동차나 스마트폰 등과 마찬가지로 배터리가 발화원인이 아닌 발화점인 경우가 더 많다. 사고결과만 놓고 보면 배터리 기술 문제로 오인하기 십상이다.
배터리 강국 위상을 위협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가운데 본지가 이번 사고와 직·간접적으로 관여된 다수 업체를 통해 사고 원인을 분석했다.
사고 원인으로 △설치 작업자 부주의·시공 불량 △필수 보호 연결 장치 누락 △배터리 시스템 결함 등이 꼽힌다. 또 화재가 발생한 대다수 ESS가 태양광·풍력발전소 연계형 설비로 '신재생+ESS' 융합형 모델의 시공·설치·소방 기준이 없어 화재 사고를 키웠다는 문제도 이번에 처음 제기됐다.
◇보호·안전장치 빠진 ESS
15곳의 대형 ESS 화재 사고 중에 일부는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원과 ESS 간 연동 과정에서 전력제어 등 보호장치 없이 시공한 사실이 드러났다. 경산변전소 등은 배터리와 전력변환장치(PCS) 중간에 위치하는 스위치 기어박스 내 서지 어래스트(Surge Arrester)를 장착하지 않았다.
서지 어래스트는 갑작스럽게 유입되는 고압의 전기로부터 설비를 보호하는 장치다. 이 장치 없이 시공하다 보니 배터리에 필요 이상 전류가 흐르면서 열폭주 현상이 발생, 이후 배터리가 불에 취약한 외함에 달라붙으며 화재로 번졌다.
일부 현장에서는 PCS와 배터리관리시스템(BMS) 등 일시적 결함 등이 화재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2018년 이전에 설치된 일부 ESS 중에 서지 어래스트를 장착하지 않은 현장이 발견됐고, 이로 인해 화재가 났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다만 최근에 설치된 ESS는 구조적인 시스템 개선으로 이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5곳 중 5곳이 작업자 부주의·시공 불량
관련 업체 자체 조사에 따르면 충남 태안 태양광발전소와 세종시 지역에 설치된 전력 피크제어용 ESS 등 화재 원인이 작업자 부주의와 시공 불량으로 파악됐다.
이 중 한 곳은 배터리의 물리적인 손상이 있었는데도 교체 등 조치를 하지 않고 시공을 강행했다. 배터리에 물리적 충격이 가해지면 배터리셀 구조에 변형이 생겨 양극과 음극을 격리하는 분리막 등이 제역할을 하지 못해 열이 발생, 화재로 이어질 수 있다.
그밖에 군산·해남 태양광발전소 등은 부실 공사가 주원인으로 지목됐다. 부실공사로 결로·누수현상이 발생하면서 전기 절연상태 저하돼 화재 발생으로 이어졌다는 게 해당 업체 설명이다.
해당 현장 업체 관계자는 “태양광발전과 ESS 각각 안전 및 공사 기준이 있지만, 태양광 등 신재생+ESS 융합형 모델의 소방, 안전 등 기준이 없다”며 “국내에 신재생 융합모델에 대한 구축·운영 경험이 짧다 보니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 초보인 '신재생+ESS'용 배터리 시스템
이번 조사에서 배터리 불량으로 화재가 발생한 사실도 발견됐다. 이는 일정 기간 생산된 극히 소량 제품으로 이 배터리 제조사는 즉각 조치를 취했다.
반면에 다수의 사고 사례에서는 배터리 시스템에 대한 문제점도 제기됐다. 뚜렷한 사고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부 태양광발전소 연계형 ESS 화재 사고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제기됐다.
태양광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가 ESS로 충전되는 과정에서, 완충 상태가 수 시간 지속된 이후 화재로 이어진 것이다.
배터리가 방전하지 못한 채 장시간 완전 충전상태로 유지되다 보니 열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화재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해당 업체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PCS나 BMS 등 각종 제어 및 보호장치 등이 제역할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분석이다.
ESS용 배터리 시스템은 일정량의 전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전기차와 달리 고출력의 충·방전하는 경우가 없다. 다만 높은 배터리 충전상태(SOC)를 지속하기 때문에 열폭주 등을 사전에 방지할 별도의 안전장치가 시스템에 반영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철완 서정대 교수는 “ESS는 리튬계 이차전지가 가장 높은 SOC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때문에 에너지 밀도 같은 성능보다 '고신뢰성'이 설계에 우선 고려돼야 한다”며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연계형으로 쓸 때는 순간 대전류와 고전압에 기인해 과충전에 견디도록 시스템 설계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태준 기자 gaiu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