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사성어 가운데에는 참으로 미련스러워 보이는 이야기가 많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나 '마부작침(磨斧作針)'이 그렇다. 혼자 힘으로 산을 옮기겠다고 나선 노인이나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겠다는 할머니나 모두 어리석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들은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서 결국은 산을 옮겨 놓았고, 도끼를 갈아 만든 바늘로 손주들 옷을 해 입히고야 말았다. 요즘 시각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남긴 교훈이 크다. 비록 어리석어 보이는 일이라 해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언젠가 목적을 이룰 수 있다. 특히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 그 우매한 할머니는 동양 최고 시선(詩仙)으로 추앙받는 이백의 큰 스승이 됐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역할·책임(R&R) 재정립 작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런데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당초 지난해 12월 출연연별 R&R 방안을 구체화해서 국민에게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발표가 계속 미뤄지고 있다. 정부 의지도 많이 꺾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저기서 안 좋은 이야기가 들려온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와 25개 출연연이 지난해 추석을 앞두고 큰 틀의 방향성을 담은 R&R 업무협약을 체결했지만 아직까지 내용을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출연연들이 소극성이 강해 R&R 작업이 미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출연연 R&R 재정립은 그동안 수탁 과제로 내어 주던 연구개발(R&D) 예산을 출연금으로 전환해 연구과제중심제도(PBS) 비중을 줄여서 역할에 맞는 장기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정작 출연금 비중을 높여 달라고 요구하던 출연연 움직임이 신통치 않은 모양이다.
과기정통부 내부에서도 R&D 주관 부서가 변화를 원하지 않는 눈치다. 예산을 관장하는 혁신본부조차 비우호 모습을 보인다는 정보 보고도 올라왔다. 출연연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도구인 예산을 쉽게 건네주지 않을 태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른 부처 R&D 예산을 출연금으로 전환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됐다.
결국 정부 수탁 R&D 예산을 출연금으로 전환하는 작업도 잠정 중단됐다. 2020년에도 정부 수탁 사업 예산을 출연금으로 돌리는 일이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와 출연연이 서로 PBS와 출연금을 양손에 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형국이다.
결국은 또다시 '의지' 문제로 돌아왔다. 이제는 정부가 얼마나 강하게 드라이브 하느냐에 따라 출연연 미래가 달렸다. 스스로도 존재 가치를 입증하지 못하는 출연연이라면 과감하게 퇴출시키고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출연연을 설립하는 방안도 심도 있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 됐다.
정부가 국민 세금으로 운영하는 출연연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국책 과제 개발을 위해 설립한 공공기관이다. 더 이상 기업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과제를 대신해 주면서 세금을 축내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경험하고 있듯이 한 번에 해결할 수 없는 난제임에는 분명하다. 곳곳에 장애물이 산적해 있다. 그래서 더욱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우직하게 밀어붙일 수 있는 '우공이산'과 '마부작침'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김순기기자 soonk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