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연구과제중심운영제(PBS) 혁신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출연금 동결 카드를 빼들었다. 진전이 없는 출연연 사업구조 재편 작업에 속도를 내기 위해 출연연에 명확한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풀이된다. 과기정통부는 정부 PBS 혁신 의지, 방향성에 출연연이 따르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출연연은 새 역할과 재무구조를 설정 작업이 단기간 내 이뤄질 수 없다고 항변했다. 과기정통부 뿐만 아니라 국가 R&D 예산, 사업 관련 부처 모두가 출연연 장기 사업 계획에 동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 '동결 압박 카드' 왜 던졌나
과기정통부의 출연금 예산 동결 결정은 교착에 빠진 PBS 개선 작업의 단면이다. 과기정통부는 PBS 혁신 일환으로 출연연이 수탁 과제를 통해 확보하는 비용을 출연금으로 전환, 지급하기로 했다. 출연연 외부 과제 수주 부담은 줄고 고유 연구 영역 경쟁력은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봤다.
과기정통부는 우선 주관 연구개발(R&D) 예산으로 잡힌 사업을 우선 검토 대상으로 삼았다. 당장 타 부처 주관 R&D 예산으로 대상을 확대하기엔 부처 간 이견 조율 등 넘어야 할 산이 많기 때문이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산하 출연연 출연금은 과기정통부 예산이다. 과기정통부 주관 수탁 과제 운영비를 전환하면 예산 명목만 바뀔 뿐 증감은 없어 이행에 장애가 없다.
과기정통부는 이를 위해 지난해 말 출연연에 새 역할·의무(R&R)와 이를 기반으로 한 수익구조 포트폴리오 재설정을 요구했다. PBS가 아닌 기관 고유사업으로 예산을 받기 위해선 그에 부합하는 연구 역량, 비전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다. 이후 포트폴리오를 기반으로 기관별 출연금, PBS의 최적 비중을 찾기로 했다. 전체 출연연은 아니더라도 올해 안으로 다수 출연연 PBS 개선 방안을 수립, 시행하는 목표였다. 하지만 과기정통부는 지금까지 단 한 개 기관과도 세부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과기정통부는 이런 상황에서 출연연 예산 수요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결정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과거 PBS 개선 논의 때마다 결국 결론은 단순히 출연금 비중을 높이는 것으로 끝났다”면서 “그렇게 해도 출연연 불만과 비효율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번 PBS 개선 방향은 연구 기관 역할을 명확히 설정하고 이에 맞는 수익구조를 세우겠다는 것”이라면서 “기존 사업 구조에서 출연금만 늘려주는 식의 해법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출연연, '미래 계획 수립' 왜 난항인가
출연연이 미래 사업구조 수립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다양하다. NST 산하 25개 출연연 연구 영역이 중복되는 부분이 있는데다 제 살을 깎아야 하는 구조조정 경험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불과 수개월 만에 미래 살림 계획을 만들다 보니 전문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짧은 기간 미래 기관 운영 계획을 수립하다 보니 결과물 완성도가 높지 않았다.
출연연 R&R, 수익구조 포트폴리오(안)을 접한 관계자는 “출연연이 현재 정부 방침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만큼 미래 계획 수립에 안일하게 대처했다”면서 “출연연 내부 합의와 외부 기관 검토를 거쳐 전문성을 확보한 계획이 나와야 하는데 상당수 기관이 그렇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출연연도 고충이 적지 않다. 과기정통부 방안대로 고유사업 영역을 확정해도 장기적으로 예산 확보가 원활치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다. 출연금은 전액 국가 R&D 예산이다. 국가 R&D 예산 지출한도는 기획재정부가 설정한다. 출연연이 수주하는 과제 또한 과기정통부 외 산업통상자원부 등 타 부처 과제가 많다. 출연연이 새 R&R를 기반으로 고유 R&D 영역을 확정해도 주요사업으로 인정받지 못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출연연 관계자는 “출연연이 과감하게 주요 사업영역을 다시 설정해도 현 구조상 장기간 예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면서 “수탁과제 예산을 타부처가 쉽게 과기정통부로 넘겨줄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승복 연구제도혁신기획단장(서울대 뇌인지학과 교수)은 “PBS 혁신과 관련해 정부, 출연연 간 신뢰가 두텁지 못한 것도 난국의 한 원인”이라면서 “출연연 R&R 설정과 더불어 예산 확보에 대한 신뢰를 확보할 수 있는 논의도 따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NST 역할도 아쉬운 대목이다. PBS 개선작업을 주관하는 NST가 직접 나서 출연연 사업구조를 조정하는데 한계가 있다. 또다른 출연연 관계자는 “NST는 대다수가 출연연 출신 인사로 구성된 조직으로 출연연 사업을 조정하기엔 이해관계가 얽힌 부분이 있다”고 전했다.
박재민 건국대 교수는 “개별 출연연 R&R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25개 출연연이 아우르는 R&R 정리가 시급하다”면서 “NST가 이 측면에서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출연연 개별 이해관계를 떠나 전체 교통정리 역할을 NST가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재 상황을 감안하면 PBS 혁신 작업과 관련해 얽힌 실타래를 단번에 풀기 어렵다. PBS에 대한 기관별 이해관계가 관계가 다르고 출발점도 상이하기 때문이다.
R&R, 수익구조 포트폴리오 완성도가 높은 일부 출연연을 대상으로 PBS 혁신방안을 만들고 먼저 이행하는 것이 현실적 대안으로 꼽힌다.
이 단장은 “PBS 혁신은 다양한 이해관계자 간 논의, 합의가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전 기관을 대상으로 삼긴 어렵다”면서 “과기정통부가 요구에 근접한 출연연을 대상으로 우선 PBS 혁신을 추진하고 이 과정에서 다른 출연연에게 노하우와 신뢰를 주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과기정통부 역할 확대가 필요하다는 주문도 나왔다. 박 교수는 “문미옥 과기정통부 1차관은 청와대 과기 보좌관 출신으로 과기 분야 전반 현안을 두루 경험했다”면서 “문 차관이 PBS 현안 전면에 주도적으로 나서는 것도 상황 해결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호 산업정책부기자 snoop@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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