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이 주주들의 반대로 20년 만에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국내 재벌기업 총수 가운데 주주 손에 의해 물러난 첫 번째 사례다. 대한항공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은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에 '반대표'를 던지면서 이번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다만 조 회장은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지만 회장직을 유지하면서 경영에 간접적으로 참여할 가능성이 있다.
대한항공은 27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 본사에서 열린 '제57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 안이 부결됐다고 밝혔다. △재무제표 및 연결재무제표 승인의 건 △정관 일부 변경의 건 △사외이사 선임의 건 △이사 보수한도 승인의 건 등은 원안대로 처리됐다.
대한항공 정관에 따르면 이사직 선임·해임 안건은 의결권 3분의 2(66.60%)가 필요한 특별결의 사안이다. 이날 주총에는 의결권이 있는 주식 9484만4611주 가운데 7004만946주(73.84%)가 표결에 참석했다. 참석자 가운데 4489만1614주(64.09%)만이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에 찬성했다. 나머지(2514만9332주, 35.91%)는 반대표를 던졌다. 조 회장은 2.51% 차이로 지난 1999년 아버지 조중훈 회장에 이어 대한항공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 지 20년 만에 대한항공 경영권을 상실하게 됐다.
조 회장의 대표이사직 박탈은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지난 26일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위)에서 '연임 반대'로 의결권을 정하면서 어느 정도 예상됐다. 수탁위는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의결권 행사지침)에 따라 기업 가치 훼손이나 주주 권익 침해 이력이 있는 조 회장을 사내이사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쪽으로 입장을 밝혔다.
조 회장은 현재 총 270억원 규모의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상태다. 대한항공 납품업체들로부터 항공기 장비·기내면세품을 사들이는 과정에서 중간에 업체를 끼워 넣는 수법으로 중개수수료를 챙긴 혐의 등을 받고 있다. 또 부인 이명희 씨와 조현아·조현민 등 자녀들이 저지른 땅콩 회항, 물컵 갑질, 장기간 폭행 및 폭언 등도 악재가 됐다.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해 국민연금 의결권 자문사인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인 ISS, 국내 의결권 자문사인 서스틴베스트 및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등은 조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안에 반대 투표를 권고했다. 해외 공적 연기금인 플로리다연금(SBAF), 캐나다연금(CPPIB), BCI(브리티시컬럼비아투자공사) 등도 조 회장의 연임에 반대 의사를 밝히면서 외국인·기관투자가 의결권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졌다.
소액주주 역할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땅콩 회항 사건의 직접적 피해자인 박창진 사무장을 비롯해 시민단체 '대한항공 정상화를 위한 주주권 행사 시민행동', 참여연대, 좋은기업지배연구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 모임 등은 소액주주 140여명(0.54%)의 위임을 받아 조 회장 연임에 반대했다.
박창진 사무장은 “조 회장 사내이사 연임 부결에 대해 환영하지만, 또 다른 꼼수를 위한 물러남이 아니기를 바란다”면서 “대한항공을 시초로 해서 경제 민주화 과정이 우리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갈 수 있길 바라며 많은 분에게 용기가 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대한항공은 이날 조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 부결에 대해 “사내 이사직을 상실한 것은 맞지만 경영권 박탈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조 회장이 여전히 대한항공의 최대주주이고, 그룹 지주사인 한진칼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번 조 회장 연임 실패는 향후 우리나라 기업 경영에서 주주 목소리가 커질 신호탄이 될 수 있다. 스튜어드십코드 활용의 확대 기조 속에 국민연금과 소액주주의 경영 활동 참여와 개입이 좀 더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 총수나 CEO 평가에서 경영 실적은 기본”이라면서 “투명 경영 원칙, 주주 친화 정책 등이 중요한 측정 지표로 떠올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류종은 자동차/항공 전문기자 rje312@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