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이 국민연금, 소액주주 등으로부부터 대표이사직을 박탈당했다. 2014년 '땅콩회항'부터 시작된 조양호 회장 일가의 '갑질'에서 비롯된 부도덕한 행위가 회사 경영과 주주가치에 피해를 입혔다는 이유에서다. 이로 인해 창립 50주년을 맞이한 대한항공은 '비전 2023' 경영전략,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연차 총회' 등 중·단기적 경영 계획에 큰 변화가 일어날 전망이다.
27일 서울 공항동 대한항공 본사에서 개최된 '제57기 정기 주주총회'는 조양호 회장 입장에서 경영권 '사수'가 걸린 중요한 날이었다. 사내이사 연임에 대해 반발이 심했기 때문이다. 1대 주주인 한진칼이 보유한 대한항공 지분 29.96%를 포함한 조 회장의 우호지분은 33.35%에 달했다. 대한항공 정관에 따라 조 회장이 사내이사를 연임하기 위해서는 주총에 출석한 주주의 3분의 2(66.6%) 동의를 얻어야 했다.
이날 주총에 참석한 주주는 의결권 있는 지분의 73.84%에 해당하는 7004만946주였다. 조 회장 측은 나머지 34% 가량의 찬성표를 확보하기 위해 외국인 투자자를 설득하고, 대한항공 임직원 지분을 위임받았다. 하지만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 안건을 찬성하는 표는 64.09%(4489만1614주)에 그치면서 20년 만에 대표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결국 대한항공은 조 회장이 사내이사 연임에 실패하면서 기존에 세워둔 경영계획에 차질을 빗게 됐다. 당장 급한 것은 오는 6월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IATA 연차 총회다. 조 회장은 이번 IATA 연차 총회 의장을 맡을 예정이지만,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박탈당하면서 무게감이 떨어지게 됐다. IATA 연차 총회에는 전 세계 120개국 280개 항공사가 참여하는 항공업계의 '유엔 총회'다.
지난해 미국 델타항공과 구성한 조인트벤처(JV) 사업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다. 대한항공은 올 4월 '인천~보스턴', '인천~미니애폴리스' 노선 등 JV 사업 안정화를 위한 미주노선에 본격 취항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조 회장의 공백으로 사업에 힘이 빠질 가능성이 높다. 또 2023년까지 연 매출 16조원, 보유 항공기 190대, 부채비율 300%대 진입 등을 달성한다는 경영계획 '비전 2023'도 추진력이 약해질 전망이다.
현재 대한항공 이사회는 조원태 대표이사 사장을 비롯한 사내이사 3명, 박남규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사외이사 5명 등 총 8명으로 구성됐다. 조 회장을 대신할 사내이사에 대한 계획은 아직 없다.
이번 주총 결과는 최근 몇 년간 드러난 조 회장 일가의 부도덕한 '갑질'에 대한 주주들의 처벌로 해석된다. 장녀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2014년 뉴욕 JFK 국제공항에서 이륙을 준비하던 항공기를 회항시킨 '땅콩회항'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이후 몇 년간 자숙하면서 경영복귀를 준비하던 지난해 차녀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갑질'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국민적 분노가 커졌다.
게다가 조 회장 부인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은 수년 간 폭언·폭행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한진가(家)에 대한 전방위 수사를 촉발했다. 조 회장은 현재 대한항공 납품업체들로부터 기내 면세품을 총수 일가가 지배한 페이퍼컴퍼니(서류상 회사)를 통해 중개수수료 196억원을 받은 혐의(특경법상 배임)로 기소되는 등 270억원 규모의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상태다.
재계에서는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 불발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전경련은 “사법부가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해야 한다는 대원칙에도 반하는 결과일 뿐만 아니라 국민연금이 민간기업의 경영권을 좌지우지하게 된다는 '연금사회주의'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있는 만큼 보다 신중했어야 하는데 아쉽다”고 강조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도 “공적연금이 기업 경영에 대단히 중요한 사내이사 연임 건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주주가치 제고와 장기적인 기업의 성장 등 제반 사안에 대한 면밀하고 세심한 검토가 선행돼야 한다”면서 “국민연금의 의결권은 기업에 대한 경영 개입이 아니라 국민 노후자금의 수익성과 안정성 확보라는 재무적 투자자로서의 본질적 역할에 초점을 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류종은 자동차/항공 전문기자 rje312@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