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오너 성역은 더 이상 없다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이 주주 반대로 20년 만에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 국내 재벌 총수를 기타 주주들이 물러나게 한 첫 사례가 됐다.

물론 대표이사직에서는 물러났지만 회장직을 유지하며 최대주주로 남아 있고, 총수 일가가 여전히 경영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우리 기업 환경에 미칠 영향은 적지 않다.

무엇보다 재계에 경종을 울렸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땅콩 회항'으로 불거진 총수 일가의 각종 전횡에 대한 엄중한 경고 성격이 강하다.

기업 총수나 최고경영자(CEO) 평가에서 경영 실적은 물론 사회적 책임 등 다양한 잣대가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그동안 수많은 재벌 총수가 사회나 기업에 막대한 피해를 줬거나 물의를 일으켜도 몇 년 뒤 아무렇지 않게 복귀하는 게 당연시 받아들여지던 관행에 변화가 예상된다.

또 주식회사(자본주의)의 근간인 주주 가치 실현과 투명 경영 원칙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계기를 주주 스스로가 만들었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

물론 몇 가지 고민도 함께 풀어 가야 한다.

먼저 이번 결과로 모든 재벌 총수를 백안시할 필요는 없다. 대주주가 경영 능력까지 뛰어나다면 기업의 의사결정 속도 등 다양한 측면에서 강점이 될 수도 있다. 현재 국내 주요 기업의 빠른 성장에는 탁월한 경영 능력이 있는 창업자나 총수 경영인의 역할도 분명 작용했다.

또 국내 296개 상장사의 주식 5% 이상을 확보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는 앞으로 더 신중하고 무거워져야 하는 이유가 된다. 특히 다양한 외풍에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건 당연하다.

이번 사건이 한국이 성숙한 자본주의로 한 단계 나아가고, 기업이 더 나은 경쟁력을 갖춘 전기로 역사에 기록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