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삼성전자는 대만 TSMC에 일격을 당했다. '팬아웃 웨이퍼레벨패키지(FO-WLP)' 기술을 앞세운 TSMC에 애플 아이폰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제조(파운드리) 물량을 모두 빼앗긴 것이다. 당초 아이폰 AP는 TSMC와 삼성전자가 나눠 생산했다. 그런데 TSMC가 FO-WLP라는 기술을 스마트폰 AP에 세계 최초 상용화하면서 판세를 뒤집었다. 심지어 TSMC는 2020년 물량까지 독점 계약을 따냈다.
삼성은 비상이 걸렸다. 반도체 패키징 기술 중요성을 간과한 뼈아픈 결과였다. 패키징은 가공이 끝난 실리콘 웨이퍼 칩(Die)을 포장하는 작업이다. 외부 습기나 불순물, 충격으로부터 칩을 보호하고 메인 인쇄회로기판(PCB)과 신호를 전달할 수 있게 하는 공정이다. 반도체 제조 과정 중 후공정에 속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했는데 알고 보니 반도체 성능을 가르는 중요 요소였다.
삼성은 2015년 태스크포스를 꾸려 대응에 나섰다. 삼성전기가 주체가 돼 삼성전자와 협력, '팬아웃 패널레벨패키지(FO-PLP)' 개발에 착수했다. FO-PLP는 입출력(I/O) 단자 배선을 반도체칩(Die) 바깥으로 빼내 반도체 성능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기판을 사용하지 않아 생산원가를 낮추는 기술이다. 특히 FO-PLP는 사각형 패널을 활용해 경쟁 기술인 FO-WLP보다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다.
삼성전기는 FO-PLP 상용화에 성공했다. 지난해 삼성전자 '갤럭시워치'에 들어간 AP를 FO-PLP로 패키징했다. 성과가 가시화되고 있었지만 FO-PLP는 아직 부족한 게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성능 반도체인 스마트폰용 AP를 패키징할 수 있을 정도 기술력과 연간 수 천만대가 팔리는 스마트폰에 대응할 수 있는 생산능력이 필요했다는 분석이다. 현재 삼성전기 PLP는 스마트워치용 AP만 적용됐고 스마트폰용 AP는 아직 진입하지 못했다. 또 PLP 라인은 1개뿐이다.
지속 연구개발(R&D)과 대규모 설비 투자가 필요한 상황인 점, 또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경쟁력을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 패키징 기술이 필요했다는 점이 삼성전기와 삼성전자 간 사업 인수 거래가 성사된 배경으로 해석된다. 투자 여력이 부족한 삼성전기 대신 규모를 갖춘 삼성전자가 이 사업을 맡아 기술 및 양산능력을 빠르게 끌어 올리고, 2020년으로 계약 종료가 다가오는 애플 물량도 다시 수주한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반도체 패키징 업계 관계자는 “2021년 아이폰용 AP를 공급하려면 2020년에 삼성도 모든 준비가 돼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할 것”이라며 “그러려면 올해 본격적으로 설비 투자를 해야 하고, 레퍼런스(공급 사례)도 만들어야 하는데 삼성전기와 삼성전자 모두 이 점에서 합의에 이른 것”이라고 평가했다.
삼성전자는 PLP 인수를 통해 취약 분야인 반도체 패키징 경쟁력을 강화할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7나노미터(㎚), 5㎚ 등 파운드리 미세공정에 속도를 내고 있는데, 이런 미세공정에 발맞춰 패키징 기술을 더해 시너지를 모색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패키징 기술 라인업 확대 차원에서 FO-PLP 뿐만 아니라 FO-WLP 기술도 개발하고 있다. FO-PLP는 권오현 부회장 시절 추진된 사업이고 FO-WLP는 김기남 부회장 지시로 시작됐다.
삼성전기는 적자 사업인 PLP 매각으로 재무 구조 개선 효과가 기대된다. 그러나 PLP를 매각하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해야 하는 것은 과제로 남는다. PLP는 삼성전기 CEO가 신성장동력으로 직접 챙기던 사업이다.
삼성이 반도체 패키징에 대한 투자에 본격 나서면 FO-PLP나 FO-WLP와 같은 반도체 패키징 산업에 긍정적인 영향도 기대된다. 반도체 패키징 중요성이 부각돼 산업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다. 국내에서는 네패스가 FO-PLP, FO-WLP 같은 차세대 패키징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삼성전기 PLP 사업 인수를 통해 애플 주문을 다시 탈환할 것인지, 또 패키징 경쟁력을 강화해 파운드리와 비메모리 사업을 확대하게 될 지 주목된다.
윤건일 전자/부품 전문기자 ben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