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도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수립 출발점인 '지출 한도'가 올해 예산 대비 7000억원 넘게 삭감됐다. 재정 상황을 감안하면 모처럼 회복한 R&D 예산 증가세를 지속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관측된다. 올해 사상 첫 R&D 예산 20조원 돌파로 한껏 고무된 과학기술계는 반짝효과에 그칠 것을 우려했다.
기획재정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관계 부처에 따르면 내년 국가 R&D 예산의 지출 한도는 약 19조7500억원으로 편성됐다. 올해 예산 20조5000억원 대비 약 7500억원 감소됐다. 전년 대비 4000억원 줄어든 상태로 시작한 2019년도 R&D 예산 지출 한도와 비교해 감액 폭이 갑절 가까이 늘었다. 현 상황만 놓고 보면 내년도 R&D 예산 편성은 20조원 아래에서 시작한다. 하반기의 예산 조정 과정에서 증액되더라도 20조원이라는 상징성을 지키는 선에서 그칠 공산이 크다.
일몰 R&D 사업이 영향을 미쳤다. 올해 종료를 앞둔 R&D 사업 예산은 약 6000억원이다. 일몰 사업이 예산에서 빠지지만 신규 사업은 지출 한도에 포함되지 않았다.
기재부는 신규 사업 평가를 통해 일몰 빈자리를 메울 계획이다. R&D 수요 가운데 정부 방향에 부합하는 사업을 선정, 반영해 2차 지출한도를 내린다는 방침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일몰 R&D 사업이 많지만 줄어드는 재정만큼 신규 사업을 채워 넣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내린 2019년도 지출 한도 대비로는 같다는 설명이다.
예산이 증액된다 해도 올해와 같은 수준의 R&D 예산 증가율을 지속하기는 쉽지 않다. R&D 예산 증가율은 2000년 들어 10%대를 유지하다 2010년 13.7%를 찍은 뒤 이듬해부터 10%선이 무너졌다. 2015년까지 매년 5~8%대를 오가다 2016년 '재정 지출 효율화' 기조와 함께 3년 연속 1%대에 머물렀다.
문재인 정부가 혁신 성장 구호 아래 올해 4.4%까지 높였지만 다른 부문에 비하면 여전히 낮다. R&D 예산 증가율은 산업·중소기업·에너지(15.1%), 문화·체육·관광(12.2%), 보건·복지·노동(11.3%), 교육(10.1%) 부문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12개 재정 분야 가운데 9위에 불과하다.
상황이 녹록하지 않다. 지출 한도가 약 7500억원 줄면서 예산을 늘리는 데도 한계가 따른다. R&D 예산 편성 출발점이 지난해와 같아 올해 예산 대비 늘어날 여지가 줄었다. 올해부터 세수 호황을 기대하기 어려운 데다 경기 대응, 복지,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에 재원이 집중될 공산이 큰 상황이다. R&D 투자가 추가로 대폭 늘어날 여력도 부족하다.
과기계는 지난해 R&D 증가율이 모처럼 회복세를 보인 상황에서 추세가 이어지길 기대했다. 연구자 주도형 기초연구, 주력산업 경쟁력 제고·중기벤처 역량 강화, 국민 삶의 질 향상 생활 연계 R&D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R&D 투자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과기계 관계자는 “R&D 예산 지출 한도는 예산 편성의 시작이자 기준인데 출발선이 지난해와 같아진 것”이라면서 “기재부가 R&D 예산을 늘려도 결국 올해 예산과 유사한 수준에 그치거나 소폭 늘어나는 것이 현실적 전망”이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정부 구호만 보면 R&D 투자가 다시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했는데 분위기는 반대로 가고 있다”면서 “2019년도 R&D 예산만 반짝 효과로 늘어난 것으로 끝날까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최호 정책기자 snoop@etnews.com, 유선일 경제정책 기자 ysi@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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