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교육대 훈련 중 휴식시간에 교관이 음대 나온 훈련병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그렇게 교관 인솔로 어딘가를 다녀온 훈련병들은 투덜대며 복귀했다. 피아노를 옮기는데 왜 음대 나온 사람을 부르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 조직에서는 특정 업무 적임자를 어떻게 판단하는가.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일부 영역을 제외하고는 기존 경험과 경쟁력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과거의 성공과 검증된 이력을 가진 인재도 디지털 시대에서는 급격히 무능해지기도 한다. 바둑에 '이적수'라는 말이 있다. 자충수처럼 상대를 이롭게 한다는 뜻의 '利敵手'도 있지만 귀가 빨개진다는 뜻의 '耳赤手'도 있다. 나보다 하수이거나 어리다고 생각한 상대가 묘수를 두었을 때 부끄러워 귀까지 빨개진다는 뜻이다.
디지털 시대 조직의 가장 큰 모순은 디지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영진과 리더는 결정권이 있고 디지털을 잘 이해하고 활용하는 실무자는 결정권이 없다는 것이다. 경영진과 리더는 자신이 디지털 기술과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다. 조직 내 위치가 주는 권력을 자신의 본질적 능력으로 착각한다. 윤석철 교수가 인용한 영국의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경의 시 'The Oak'에 나오는 'Naked Strength'의 개념을 곱씹어 볼 만하다.
노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경험의 시대는 끝이 났다. 경험이 존중받던 농업마저 상황이 달라졌다. 청년들이 시골 마을 밭을 빌려 고구마 농사를 짓겠다고 했다. 이들은 밭의 흙을 얇게 걷어내고 롤러를 이용해 바닥을 단단히 다졌다. 마을 노인들은 쟁기질을 해도 모자랄 판에 밭을 길바닥처럼 다지고 있다고 혀를 찼다. 농사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이 빌린 밭을 다 망친다고 걱정했다. 청년들은 다져진 밭에다 고구마를 놓고 흙을 일정한 높이로 덮었다.
고구마를 수확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마을 노인들은 새로운 재배법을 이해하고 무릎을 쳤다. 수확한 고구마는 땅이 단단해 들쭉날쭉 자라지 않고 균일한 크기였다. 요즘 소비자는 한 입에 먹기 좋은 적당한 크기 고구마를 원한다. 고구마를 선별해 포장하는 인건비가 토지 임대료보다 훨씬 높으므로 선별 작업이 필요 없도록 알맞은 크기로 재배하는 것이 핵심이다. 농업은 더 이상 초본 식물의 특성을 이해해 생산량을 최대화하던 경험이 중요하지 않게 됐다. 농업이 이럴 진데 제조업과 서비스업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디지털 시대의 젊은 세대들이 시도하고 혁신하고자 하는 새로운 방식을 과거의 경험에 기반해 판단하는 리더와 경영진은 고구마 밭의 노인과 다르지 않다. 새로운 디지털 세대의 혁신안과 묘수에 무릎을 치며 귀가 빨개져야 한다. 耳赤手에도 부끄럽지 않은 것은 그 혁신안을 이해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제로페이는 가맹점 결제 수수료를 낮추기 위한 시도다. 그러나 지불방법은 지불하는 쪽이 결정하지 지불받는 쪽이 주도권을 쥐기는 힘들다. 제로페이 가맹점을 늘리는 것은 홍보와 행정력으로 가능하지만 정작 소비자 지불 방법을 변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소상공인을 돕고자 한다면 소상공인 매장을 디지털화해서 본질적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먼저다. 고비용의 무인 주문 키오스크를 도입하지 않고도 간단한 방법으로 주문과 결제를 디지털화하는 것이 가능한 시대다. 문제는 소상공인 스스로도 정부 책임자도 이러한 耳赤手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대를 이어 보안관을 해오는 베테랑 형사(토미리 존스)는 단발머리 자객(하비에르 바르뎀)의 살인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고전한다. 자신의 경험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 앞에서 독백한다. “There is no country for old men.” 노인으로 대접받기보다 귀가 빨개지도록 디지털 세대에게 배워야 한다.
강태덕 박사 streetsmartka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