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의 중단평형론에 따르면 생물 종이 집단으로 대단히 큰 긴장이나 특별한 위기에 한동안 노출되면 장기간에 걸쳐 나타날 진화의 큰 변화가 짧은 기간에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결과로 나타난 진화는 큰 위기를 겪은 후 원상태로 돌아가지 않는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정상 상태로 회복되는 과정에서 팬데믹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과 궤를 함께하는 말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으로 올해에만 제조업이 3% 이상 역성장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으며, 완전 고용에 가깝던 미국의 실업률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경기 침체가 1920년대 말 대공황 수준 또는 그 이상이 될 것이라는 비관 시각도 있다. 세계 각국이 말 그대로 각자도생의 환경에 놓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대공황 때와 전혀 다르다. 전 세계를 촘촘하게 연결해 온 글로벌 공급망이 한순간에 무너지면서 생산과 교역이 중단됐다. 한꺼번에 무너진 세계 경기는 단기간에 정상화하기 어려울 전망인 데다 국제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예측하기도 어렵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는 당혹스러운 상황을 겪으면서도 한편으로는 4차 산업혁명 기술이 우리 생활에 이미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실감하게 됐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를 이용한 바이러스 전파의 예측, 사물인터넷(IoT)에 연결된 헬스케어시스템, 자율 로봇 기술, 휴대용 첨단기기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이 상황을 호전시키고 언택트(비접촉) 산업이라는 새로운 산업을 급속하게 확대 및 성장시키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팬데믹이 종식된 이후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향후 방향은 이미 전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많은 사람이 4차 산업혁명 진행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지금까지와 다른 것은 4차 산업혁명이 진행돼 온 그동안의 패턴이 연착륙이었다면 향후의 4차 산업혁명은 급격한 변화와 고통을 감수하는 경착륙 패턴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무인 자율생산 체제와 물류 체계 등이 산업 전반에 급속히 자리 잡게 됨에 따라 가뜩이나 염려한 고용 문제가 현실화해 극심한 실업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침체의 늪을 벗어나기 위해 큰 비용과 노력을 투입할 때 전통 산업보다는 신산업 영역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가 지금 보고 있는 것처럼 무리해 보이는 정책을 동원해서라도 위기를 극복하려 할 것이며, 팬데믹 이후의 새로운 환경에서 국제 사회의 유리한 위치에 서려 하는 배경이 크게 작용, 경착륙 양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선진국들은 위기 때도 작동될 수 있는 공급망을 구축하려 할 것이다. 인건비나 물류비를 줄이기 위해 다른 나라에 진출해 있던 기업들의 회귀(리쇼어링)가 본격화되고, 첨단산업 보호가 강화될 것이다. 기업들은 제조업 회귀로 높아지게 될 원가 부담을 줄이기 위해 4차 산업혁명 기술을 본격 도입해서 규모의 경제의 벽을 넘으려 할 것이다. 365일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무인 자율공장들이 협업 생산하는 제품이 자율 물류 체계를 통해 세계로 공급되는 새로운 공급망이 형성될 것이다.
자국 산업과 첨단 기술에 대한 보호가 강화되면서 통상 마찰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다. 자국 내 구축된 공급망을 우선시하는 정책으로 더 이상 질 좋은 상품을 값싸게 향유하기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그 대신 기후변화나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상품 가격에 반영하는 등 가격 결정 기준이 달라질 것이며, 국제 교역의 잣대가 될 수 있다. 선진국들은 새로운 공급망과 통상 질서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장악하려는 노력을 더욱 가속할 것이다.
다음 주에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달라질 4차 산업혁명의 전개 방향을 살펴본다.
박종구 나노융합2020사업단장, '4차 산업혁명 보고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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