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기가 연중 불황을 모르는 '사계절 가전'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호황을 누리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위생가전 중 하나인 정수기를 구입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으로 분석된다. 집에서 음료를 만들어먹는 '홈 카페족'이 등장해 얼음정수기가 각광을 받았다. 필터교체 등 관리가 중요한 제품 특성상 '렌털 정수기'가 대세를 이루었다. 수돗물 유충 사건이 사회적 충격으로 다가오면서 정수기 산업 성장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정수기 판매 호조…얼음정수기 '각광'
코로나19 대확산에도 정수기 시장은 호황을 누렸다. G마켓에 따르면 상반기 정수기 판매량은 전년대비 126% 증가했다. 청호나이스도 상반기 정수기 판매량이 25% 늘었고, 웰스는 같은 기간 37.6% 성장했다. LG전자 LG퓨리케어 듀얼정수기는 6월 말 출시 이후 한 달 만에 1만대를 판매했고, 삼성전자 정수기 냉장고는 5월 대비 7월 판매량이 4배 증가했다.
롯데하이마트 관계자는 “정수기는 사계절 필수가전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면서 “계절을 타는 다른 가전과 달리 정수기는 연중 꾸준히 팔린다”고 말했다.
얼음정수기가 시장 성장을 이끈다는 점은 중요한 특징이다. 단순 정수 기능만 갖춘 제품보다는 즉석에서 얼음을 만들어주는 제품이 인기다. 코웨이 아이스(AIS) 얼음정수기 신제품은 6~7월 판매량이 지난해보다 15% 증가했다. 청호나이스 얼음정수기는 상반기 판매량이 35% 늘었고, 쿠쿠홈시스 인앤아웃 아이스 10's 제품 역시 2분기 판매량이 전분기 대비 126% 급증했다. SK매직은 상반기 올인원 직수 얼음정수기가 작년보다 250% 많이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업계는 코로나19와 얼음정수기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본다. 집에서 음료를 만들어 먹는 이른바 '홈 카페' 트렌드가 널리 퍼지며 자연스레 신선한 얼음 수요도 늘었다는 것이다. 2003년 얼음정수기 첫 등장 이후 참여 업체가 늘고 기술도 발달했다. 코웨이 AIS 정수기는 하루 3번 2시간씩 얼음 탱크를 UV LED로 자동 관리한다. 청호나이스는 2003년, 코웨이는 2009년, SK매직은 2017년 얼음정수기를 도입했다.
청호나이스 관계자는 “청호나이스가 얼음정수기를 처음 도입한 이후 참여 업체가 늘면서 시장이 커졌다”면서 “활용성과 편리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정수기 시장 주류로 자리잡았다”고 말했다.
◇정수기, 대세는 렌털
정수기 시장 성장은 곧 렌털 시장 성장으로 요약된다. 물통 하나, 정수관 하나까지 세심하게 관리해주는 렌털만의 매력이 소비자를 사로잡고 있다. LG전자는 정수기 판매 90%가 렌털이며 이 비중은 코웨이 85%, 청호나이스 80%다. 렌털 도움 없이 자가관리 방식으로 정수기를 이용하는 사람은 구매자의 10~20% 내외에 불과하다고 추정하는 근거다.
정수기는 마시는 물을 담아두거나 혹은 거르기 때문에 자주 관리해주는 게 중요하다. 특히 불순물을 거르는 필터는 정기 교체가 필요해 렌털서비스가 도움이 된다. 100만원을 훌쩍 넘는 비싼 정수기를 일시불로 구매하기보다는 렌털로 사는 게 비용 부담이 적다.
렌털 업계 관계자는 “렌털을 이용하면 주기적으로 관리를 받을 수 있고 고장나면 AS를 받을 수도 있다”면서 “코로나19 이후 위생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정수기 렌털 수요가 더 늘었다”고 말했다.
◇수돗물 유충 파문…정수기 시장 커질 듯
정수기 시장 성장 흐름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국내 정수기 시장은 2017년 기준 연간 222만대 규모를 형성하고 있다. 금액으로는 2조3000억원 정도다. 2015년 연간 200만대·2조원을 동시에 돌파한 이후 꾸준히 이정도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2011년 177만대·1조7000억원과 비교하면 6000억원 이상 커졌다. 환경부 추산 정수기 보급대수는 600만대이고, 총가구수는 2000만가구여서 성장 여유가 있다.
최근 벌어진 수돗물 유충 사태는 정수기 산업 성장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유충 사태가 곧 정수기 구매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실제로 유충 사태 이후 정수기 업체들은 '정수기가 유충을 거를 수 있느냐'는 문의를 많이 받았지만, 문의가 구매로 이어지는 비율은 낮았다. 그러나 7월 초 수돗물 유충 사건이 알려진 후 공식 접수된 유충 의심사례는 3000여 건에 달한다. 실제 유충이 발견된 건 이보다 적지만, 불안감이 널리 퍼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과거 사례를 볼 때, 수질 불안이 널리 퍼지면 정수기 산업이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김동환 연구원(서울시립대 박사과정)은 6월 한국환경기술학회지에 게재된 논문(사회적 환경변화에 따른 정수기 기술의 진화)에서 1990년 정수장 발암물질 검출 사건, 1991년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 2019년 붉은 수돗물 사건 등을 언급하고 “정수기 사업은 수돗물 위생이 불안전하고 사회적으로 신뢰도가 낮아질수록 시장이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면서 “수돗물에 대한 부정적 언론보도가 사회적 여론으로 확산하는 시기에 정수기 상품이 확산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고 짚었다.
김용주기자 kyj@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