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신문은 '2021 문윤성 SF 문학상'을 제정하고 이달부터 내년 1월 31일까지 출품작을 모집한다. 1965년 국내 최초 SF 장편소설 '완전사회'로 문학계에 충격을 안긴 문윤성 작가를 기리는 이 문학상이 과학과 SF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20대 밀레니얼 세대 SF 작가 4인의 칼럼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새로운 안목과 통찰력을 얻기를 바란다. -편집자주-
무엇을 위해 태어났고, 왜 사는가와 같이 거창한 질문을 두고 상념에 빠져 있다가, 별안간 사람이 막을 수 없는 사고나 재해를 만나면 그 순간 삶이 거대한 농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땐 산다는 건 거창하지 않고 허무한 일이며, 우리는 미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에 다른 전염병들이 세계를 휩쓸고 갔다곤 해도 그것은 나와 먼 옛날 일이라고만 여겼다. 전 세계에 전염병이 유행하여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상상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현재의 내 삶과는 멀리 떨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계는 달라졌다.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체념이 나를 우울감에 젖게 할 무렵, 문득 떠오르는 SF가 있었으니, 바로 미국 작가 코니 윌리스의 1992년 작품인 '둠즈데이북'이었다.
'둠즈데이북'은 2054년, 시간여행이 가능해진 시대, 유럽 중세에 관심이 있는 열정적인 역사학도 키브린이 연구를 위해 중세시대로 갔다가, 흑사병의 위험에 말려드는 이야기다. 미래의 역사학도는 '네트'라는 장치를 통해 시간여행을 할 수 있고, 손목뼈에 이식한 관찰 기록용 녹음기를 통해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다. 그가 기록할 때의 모습은 과거인에게는 마치 신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중세는 위험도가 높은 시대로 분류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키브린의 시간여행을 반대한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라틴어를 공부하고, 말 타는 법을 익히고, 중세식 옷을 준비하고, 중세인의 손톱이 가지런하지 않을 거라 판단하여 본인의 손톱까지 거칠게 만든다. 단단히 준비를 마친 키브린은 중세로 떠나지만, 그 앞에는 험난한 여정이 펼쳐져 있다.
이 이야기는 2054년과 중세의 상황이 번갈아 가며 제시되는데, 한편으로는 사람 사는 곳은 과거나 현재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중세인은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 애쓰고, 어린아이는 호기심 서린 눈빛으로 세상을 본다. 현재의 사람들도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황당한 소문을 믿는다. 중세로 간 키브린은 사람들을 보며 앞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가 떠나온 세계도 다가올 사건에 대해 모르는 건 매한가지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자들이다. 암울한 현실을 갑자기 좋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이도, 계획대로 일을 꾸민 악역도 없다. 누군가는 무언가에 집요하게 집착하고, 중요한 순간에 딴청을 피우기도 하고, 자신이 하는 일을 방해받아 화를 내기도 한다.
코니 윌리스의 책을 처음 접한 독자는 그의 소설이 수다스럽다고 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스타일 때문에 현실감이 증폭되고 생생한 캐릭터가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의 소설이 거대한 농담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흑사병이 창궐한 중세와 2054년은 사람이 쉴 새 없이 죽는다. 하지만 생사를 오가는 긴급 상황에서도 인물들은 시트콤에 등장할 것처럼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 이야기 전체에 흐르는 그의 농담은 염세적이거나 자조적이지 않고 다정하게 느껴진다. 참상 이후의 삶은 기대해 볼 만하다는 듯이. 삶에 대한 희망을 품어보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예측해보건대 전염병의 유행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19가 끝나면 또 새로운 바이러스가 나타날 것이다. 질병에 대항하는 약을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새로운 병이 생기는 것을 원천 차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시기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서로가 서로를 돕는 일밖에 없다. '둠즈데이 북'에서는 타인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건 로슈 신부가 등장한다. 가난한 문맹자이지만 예배를 집전하기 위해 라틴어 구절을 모두 외워버릴 정도로 신에 대한 믿음이 누구보다 신실한 자다. 그는 종교가 사람을 구하지 못한다는 게 확실해졌을 때에도 좌절하지 않고 용기 있게 타인에게 손을 내민다.
신부는 키브린을 하늘에서 보내준 '캐서린 성녀'로 착각하고 병에 걸린 자들을 돌보는데, 그는 키브린이 곁에 있었기에 자신이 이웃을 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키브린을 생존할 수 있게 도와준 이는 로슈 신부다. 그와 같은 사람이 있기에 세상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 의지하여 산다. 혼자서 살 수 있는 이는 없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도 타인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의사와 간호사, 약사 선생님들, 그리고 그 이외에도 의료폐기물 처리업체와 청소 방역업체 직원분들이 있다. 그리고 질병에 취약한 사람을 위해 항상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삶이 거대한 농담처럼 느껴질 때, 나는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들을 보고 마음을 다독이며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진정 세상을 구하는 자는 누구인가.
박해울 소설가
*단국대에서 문예창작 학사와 석사를 전공했다. 대학 재학 중인 2012년에 <계간문예> 소설부문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기파'로 2018년 제3회 과학문학상 장편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