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에서 1666년과 1905년은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로 꼽힌다. 1666년 아이작 뉴턴은 흑사병을 피해 고향 울즈소프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때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한다. 백색광이 프리즘을 통해 무지개색으로 분해되는 원리 발견, 미적분학 확립도 같은 해 일이다.
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빛이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동시에 가지는 것을 보여준 '광전효과'를 포함, 특수상대성 원리, 브라운 운동, 질량에너지공식(E=mc2) 등 서로 다른 주제의 논문 4편을 발표했다.
남이 평생 한 번 이루기도 힘든 업적들을 한 해에 동시 발표하는 기적 같은 일을 해냈다.
나노입자를 연구해 온 필자의 인생에 있어서는 올해가 그런 기적의 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고체 결함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음을 보여준 논문이 네이처 표지를 장식했다. 또 과산화수소를 친환경적이면서 값싸게 제조하는 촉매 개발 성과를 네이처 머터리얼스에 발표했다. 이어 뇌전증 발작 위험을 실시간 감시하는 포타슘(칼륨) 나노센서 개발 성과까지 네이처 나노테크놀로지에 실렸다. 더불어 박정원 책임연구원(서울대 교수)과 함께 고해상도 액상 투과전자현미경(리퀴드 셀 TEM)으로 개별 나노입자 3차원 구조를 관찰한 성과도 사이언스 표지 논문으로 실렸다.
1905년의 아인슈타인이 그랬듯, 필자 역시 서로 다른 주제의 논문 4편을 2020년 상반기 네이처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여기에는 차이가 있다. 논문 4편을 혼자 쓴 아인슈타인과 달리, 위 4편 논문의 저자는 모두 10명이 넘는다. 1900년대 초반에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 한 명이 중요한 과학적 발견을 하거나 새로운 이론을 정립했다. 하지만 21세기에는 더이상 한 명의 천재가 큰 과학적 업적을 이루기 어렵다.
과학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들이 더욱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현대과학은 각 분야 전문가들이 긴밀하게 협력해야 위대한 성과를 낼 수 있다. 최근 경영학 화두인 '오픈 이노베이션'이 과학에서도 필요한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지난 10년간 발표한 대부분 논문들은 여러 국내외 공동연구 산물이다. 소속과 전공을 망라하는 다양한 전문가들이 참여하지 못했다면 이 같은 성과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초과학연구원(IBS)은 이런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앞서 언급한 네이처 논문은 연구에만 7년 이상 소요됐고, 논문 기고와 출판에는 2년이 더 결렸다. IBS 지원을 받아 미국 UC 버클리에 파견한 연구원들을 중심으로, 현지 연구진과 4년 이상 긴밀히 협력한 끝에 논문 한 편을 완성할 수 있었다.
또 사이언스 표지 논문을 발표한 박정원 책임연구원은 IBS 교수 충원 프로그램을 통해 서울대 교수로 임용됐다. 박 책임연구원은 미국 최고 대학들의 엄청난 정착 지원 제안을 거절하고, IBS 나노입자 연구단의 책임연구원이자 서울대 교수로 남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지난 4년간 미국 최고 대학의 어느 조교수보다 우수한 연구성과를 발표해오고 있다.
기적의 해 맞이를 축하하듯 뜻밖의 영예도 찾아왔다. 지난 23일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가 발표한 '노벨상 수상 유력 후보'에 필자가 이름을 올린 것이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노벨상 수상 유력 후보'로 선정된 연구자 중 54명이 실제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번 선정에는 2001년 미국화학회지(JACS)와 2004년 네이처 머터리얼스에 발표한 '승온법' 개발 연구가 주요하게 작용했다. 승온법은 필자가 고안한 균일한 크기의 나노입자를 대량 합성할 수 있는 기술이다.
우리 연구단뿐만 아니라, IBS의 30개 연구단은 '기적의 해'를 맞이할 준비가 다 돼가는 듯하다. IBS는 착수 5년 만에 네이처 '라이징 스타'로 선정돼 이름을 알렸고, 이후 빠르게 성장해 올해 세계 '정부 연구소' 중 17위에 올랐다.
네이처 평가 지표인 '네이처 인덱스'를 적용한 결과인데, 그만큼 세계 유수 과학저널 논문 게재 비율이 높다. 역사가 100년에 가까운 연구소들이 즐비한 세계 과학계에서, 아직 10년도 되지 않은 IBS가 이런 성과를 낸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 모든 것이 국가의 중장기적 기초과학 지원과 적극적인 신진 연구자 양성 정책 덕분이다.
기적의 해를 만든 주인공 뉴턴은 '내가 더 멀리 봤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위대한 과학자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난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여러 과학자들이 차근차근 쌓아 올린 업적들이 모여 세상을 놀라게 할 발견이 나온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기초과학에 대한 꾸준한 지원을 토대로 거인들은 만들어지고 있다.
함께 연구하는 동료 거인들과 맞이할 또 다른 기적의 해를 기대해본다.
현택환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입자 연구단장(서울대 석좌교수) thyeon@ibs.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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