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7일 인천 영종도 BMW 드라이빙센터에 전 세계 자동차 업계 이목이 쏠렸다. 이날 독일 BMW그룹은 주력 모델 5시리즈와 6시리즈 신형을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공개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 이후 BMW그룹의 첫 대규모 공식 행사였다.
BMW가 한국을 데뷔 무대로 결정한 것은 우수한 코로나19 방역체계와 시장 중요성이 고려됐다. 올해 1~4월 기준 5시리즈의 국내 누적 판매량은 전 세계 1위, 6시리즈는 2위다. 5시리즈 세계 최초 신차 공개는 한국 프리미엄 세단 시장의 중요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韓, 세계 2위 프리미엄 세단 시장
한국이 새로운 프리미엄 세단 격전지로 떠올랐다. BMW, 메르세데스-벤츠, 아우디 등 독일차가 주도하던 한국 프리미엄 세단 시장에 제네시스, 볼보 등이 가세하면서 시장 규모를 키우고 있다. 국내 6000만원대 이상 프리미엄 세단 시장 규모는 국산차와 수입차를 통틀어 연간 15만대 수준이다. 프리미엄 E세그먼트 세단 기준 한국은 중국에 이어 세계 2위 시장으로 평가된다.
세계 주요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가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도 남다르다. BMW는 5시리즈 세계 최초 공개 시장으로 한국을 지목했고, 벤츠도 어느 국가보다 한국에 빠르게 신차 물량을 쏟아내며 공을 들이고 있다. 아우디나 볼보 입장에서도 한국은 세단이 가장 많이 팔리는 주요 시장 중 하나다.
실제 국내에서 프리미엄 세단은 각 브랜드 판매량을 좌우할 정도로 절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5년까지 5시리즈를 바탕으로 부동의 수입차 1위 자리를 지켰던 BMW는 2016년 E클래스에 동급 판매 1위 자리를 내주며 수입차 왕좌를 빼앗겼다. 제네시스는 2008년 1세대 출시 이후 올해 선보인 3세대까지 G80 인기를 발판 삼아 프리미엄 자동차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클래스는 벤츠를 수입차 1위 브랜드로 만든 효자 차종이다. 2016년 처음 출시한 10세대 E클래스는 지난해 7월 수입차 역사상 최초로 단일 모델 10만대 판매 기록을 세웠다. 2003년 출시한 8세대 E클래스 연간 판매량은 1388대 수준이었으나 지난해에는 3만7717대까지 성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해 7만8483대를 판매한 벤츠는 쉐보레(6만9907대)를 앞질렀다.
전 세계적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열풍 속에서도 한국인들의 세단 선호는 남다르다. 세단은 압도적으로 많은 SUV 신차 공세 속에서도 내수 자동차 시장 점유율 절반을 지켜내고 있다. 자동차를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닌 성공의 상징으로 여기는 한국 시장의 문화 특성은 프리미엄 세단이 계속 인기를 끄는 주된 이유로 꼽힌다.
실제 벤츠코리아가 다음소프트에 의뢰해 발표한 E클래스 소셜 빅테이터 자료에 따르면 E클래스 인기는 한국의 사회적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됐다. E클래스 인기를 설명하는 주요 키워드에는 △성공 △맞벌이 △가성비 등이 꼽혔다.
수입차 한국법인 관계자는 “세계 주요 프리미엄 자동차 본사들이 한국 시장의 고가 세단 판매 성과를 무척 놀랍게 생각한다”면서 “신차에 대한 반응을 판단할 때도 판매 비중이 높은 한국 시장 현황을 실시간 체크하며 예의주시할 정도”라고 전했다.
◇시장 주도권 뺏으려는 제네시스·아우디·볼보
지난 수년간 수입차 선호도가 급증하면서 프리미엄 세단 시장 역시 벤츠, BMW 브랜드 쏠림 현상이 지속돼왔다. 그러나 지난해 말부터 상품성을 크게 높인 경쟁자들이 시장에 쏟아지면서 소비자 선택의 폭도 한층 넓어졌다. 국산차 제네시스를 비롯해 시장 복귀를 선언한 독일차 아우디, 신흥 강자로 주목받는 유럽차 볼보 등이 대표적이다.
올해 성장세가 가장 가파른 브랜드는 국산차 제네시스다. 제네시스는 올해 1~9월 7만7000여대를 판매하며 쌍용, 르노삼성은 물론 벤츠 전체 판매량까지 넘어섰다. 성장을 이끈 주역은 3세대로 완전 변경을 거친 프리미엄 세단 G80이다. G80은 제네시스 전체 판매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E클래스, 5시리즈를 일찌감치 따돌렸다.
2013년 2세대 출시 이후 7년 만에 완전변경에 나선 G80은 크레스트 그릴과 쿼드램프를 적용하면서 제네시스 차세대 디자인을 완성했다. 차량 무게를 줄이고 초고강도 강판 비율 높여 안전성을 확보했고, 고속도로 주행보조처럼 지능형 주행 기술을 선보였다. 법인 임원 차량으로 선호도가 높은 데다 수리비와 보험료 등 소유 과정에서도 수입차보다 유지비가 적게 든다는 장점도 있다.
아우디는 지난해 10월 프리미엄 세단 A6 출시를 기점으로 디젤게이트 이후 공백을 메우며 수입차 시장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A6 8세대 완전변경 모델은 강력한 성능과 넓은 실내 공간, 새 아우디 디자인 언어를 적용해 더 날렵한 모습과 첨단 장비로 30~40대 소비자를 공략했다. A6는 올해 들어 9월까지 7500여대를 판매, 수입 프리미엄 세단 판매 3위에 올랐다. A6 효과를 바탕으로 아우디는 올해 누적 판매 1만7000여대를 기록, 수입차 3위에 안착했다.
지난해 1만대를 넘어선 볼보도 프리미엄 세단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지난달 차체를 대폭 키우고 상품성을 강화한 S90 부분변경 모델을 출시하면서 독일차가 주도하던 시장에 뛰어들었다. S90은 출시 전 사전계약에서 3200여대, 이달까지 누적 계약 5500여대를 기록하며 독일차 외에 새 선택지를 원하는 소비자들의 수요를 흡수했다. 전 차종 하이브리드 엔진 탑재와 차체 크기 확대 등 한층 높아진 상품성에 합리적 가격 책정이 S90 인기 비결이다.
전통의 강호 BMW 5시리즈와 벤츠 E클래스 격돌도 관전 포인트다. 그동안 출시 시점이 달랐던 두 차종은 이달 나란히 신형으로 모델을 교체하면서 직접 경쟁이 불가피해졌다. 올해 두 차종의 수입차 시장 점유율은 25% 수준에 달한다.
먼저 BMW가 승부수를 띄웠다. 이달 초 판매를 시작한 신형 5시리즈는 디자인을 다듬어 완성도를 높이고 9종에 달하는 다양한 트림과 엔진 구성으로 소비자 선택의 폭을 확대했다. 벤츠 E클래스 역시 부분변경 모델임에도 전후 디자인을 모두 바꿔 신차 수준 변화를 줬다. 차세대 주행 보조와 최신 MBUX 멀티미디어 등 가장 진보한 주행보조 시스템으로 상품성을 강화했다.
업계 관계자는 “BMW와 벤츠가 이끌던 프리미엄 세단 시장에 다른 브랜드 신차가 잇달아 출시되면서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면서 “향후 자동차 브랜드 간 판매 순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치연기자 chiye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