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마주앉았으나 인터뷰를 시작하자 그는 돌변했다. 30년 HP인의 경험은 원숙한 통찰과 지혜가 되어 말로 쏟아져 나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로 새로운 세상이 온 것이 아니라, 이 변화가 실은 진작부터 일어난 것이고 코로나19는 촉매제일 뿐이라고 진단했다. 인구구조와 기술흐름, 소비자 인식을 볼 때 지금의 변화는 필연이라는 것이다. 현상이 아닌 본질을 꿰뚫는 그의 눈이 번뜩였다. HP코리아는 사업계획을 논할 때 아예 '코로나'라는 말 대신 '뉴노멀'을 쓴다.
1992년 HP코리아에 신입사원으로 들어가 사장 자리까지 뚜벅뚜벅 걸어 올라간 김대환 HP코리아 대표를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났다.
오후 한 시에 만났는데도 실내는 어둑어둑했고 일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김 대표는 “직원 대부분이 9개월째 재택근무 중”이라면서 “뉴노멀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빨리 변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한국은 물론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뉴노멀은 HP코리아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내부적으로 길어지는 재택근무 효율성을 높이고 직원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사업적으로는 PC 판매량이 늘고 프린터 사업이 되살아났다. 이에 맞춰 HP는 다양한 기업의 경영상황을 고려해 PC 구독 서비스까지 내놨다.
재택근무나 재택교육 등 새로운 기준이 일상이 된 현실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김대환 대표에게 물었다.
대담=홍기범 전자자동차부장
-코로나19로 기업 환경이 많이 바뀌고 있다. HP는 어떤가.
▲사내에서 '코로나'라는 용어를 쓰지 말자고 했다. 대신 '뉴노멀(New Normal·새로운 기준)'이라고 표현한다. 이미 세상은 한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코로나가 가속화했을 뿐이다. 사업계획서에도 뉴노멀이라고 쓴다. 코로나가 아니라 뉴노멀이 원인이라고 본다. '세상 변한다' 이런 이야기 많이 하는데, 세상 변하는 걸 요즘 느낀다. '아 이런 걸 세상이 변한다고 하는구나' 싶다.
변화의 중심은 사람이다. IDC 조사를 보면, 2025년 밀레니얼·Z세대가 전체 업무인력의 75%다. 90년대 태어나서 2025년 되면 나이대가 딱 일하는 시점이다. 그전에 태어난 베이비부머·X세대와는 다르다. 세상이 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이 중요하다.
사람 다음으로 중요한 건 기술, 즉 '디지털 전환(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다. 가상현실(VR), 인공지능(AI), 사이버시큐리티, 빅데이터 이런 건 예전에는 중요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정보를 토대로 비즈니스 활동을 했지만 이제는 이걸 분석해서 의사결정에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지속가능경영이다. 80년, 90년대 기업가치 결정요소는 주주가치 극대화였다. 기업은 궁극적으로 이익을 내야 했다. 이제는 과거처럼 하면 안된다. 기업 구성원, 즉 직원과 파트너, 고객, 공급망 이런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또 환경문제가 중요하다. 플라스틱 만들어서 막 버리고 환경 어지럽히면 고객들이 싫어한다. 마지막으로 사회 환원, 이게 다 묶여야 기업 가치가 높아지고 고객이 제품을 선택한다.
'사람·기술·지속가능경영' 3가지 관점에서 세상이 엄청나게 변하고 있다. 코로나는 이런 변화를 가속화한 촉매제다.
-최근 변화의 핵심은 무엇이고 HP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
▲재택하면 일이 안 될 줄 알았다. 근데 잘 된다. 근무환경을 어떻게 구성해줘야 직원들이 편하게 일할 것인지 많이 고민한다.
HP 글로벌 전직원 미팅에 들어갔는데 '협업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집에서 일을 하다가도 중간중간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조율할 수 있는 집합 공간도 있어야 한다.
전통적 사무실을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이걸 다른 쪽으로 재투자할 필요가 있다. 대여해주는 공간이 많다. 이와 관련해 '유연성(flexibility)·모바일·보안(security)'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업무 형태나 장소가 특정 장소에 국한될 필요가 없다. 집, 공유오피스, 사무실 등 다양하다. 움직이는 동안 일할 수 있는 모바일 환경도 중요하다. 외부에서 일을 하니까 보안도 중요하다. HP는 특히 보안 신경 많이 쓴다.
-재택근무하면 경영자 입장에서 불편한 것은 없나.
▲2월 말부터 재택 시작해서 9개월 됐다. 과거 일하던 영향이 있어서 초반에 조금 힘들었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기술적 지원을 많이 했다. 가상사설망(VPN)이나 모바일 디바이스, 영상회의 애플리케이션 등을 지원했다.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직원들 감성을 건드려줘야 한다. 재택 환경에서 직원들의 마음을 잘 다독여줘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집에서 일하기 때문에 혼자 일하는 것처럼 느낀다. 외롭다는 느낌이 많다. 그래서 온라인 활동을 많이 했다. 온라인 요가, 사진찍기, 색칠하기, 축구이야기, 와인마시기 등 직원들이 외롭다고 느끼지 않고, 회사의 일원으로 느끼게 하려고 노력했다.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 세대는 회사에서 일하고 집에서 쉬었는데, 갑자기 집에서 일하라니까 일 공간 확보가 안 된다. 낙관적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 매니저들이 이런 생각을 전달해야 한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빨리 변화하는 게 좋다.
-PC업계가 3분기 최고 실적 나왔다고 한다. 앞으로 전망은.
▲사람들은 물건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게 아니고 수요가 너무 늘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HP는 이런 변화에 대응을 잘 했다.
처음으로 돌아가 뉴노멀을 이야기하면, 과거 집에 PC가 한 대씩 있었다. 지금은 1인 1PC 시대가 열리고 있다. 교육 분야도 마찬가지다. 재택교육이 일반화하고 있다. 학교 컴퓨터실만으로는 교육이 힘들어졌다. 그래서 PC 수요가 단기간에 급증했고, 공급이 이것을 따라가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코로나19로 중국 공장이 잠시 쉬었기 때문에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 것뿐이다. 1인 1PC 시대가 올 것이다. 다만 그게 노트북일지 태블릿PC일지, 요가태블릿일지는 모르겠다.
-내년에 HP코리아 입사 30년이라고 들었다. 외국계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해서 사장까지 됐다.
▲나는 운이 좋았다. HP 문화 덕분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트러스트 앤드 리스펙트, 믿고 존중하는 게 HP 문화다. 이 회사에서 열심히 일 해온 원동력이다. 이 가치 덕분에 오래 있었던 것 같다. HP 기업가치가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다른 회사는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HP의 모든 게 하드웨어 중심이었으나 점차 서비스 중심으로 변화했다. 나는 이걸 '사람 중심'이라고 해석한다. 예를 들어보자. 디바이스만 팔면 그건 하드웨어 중심이다. 그런데 코로나 뉴노멀 상황에서 '어떻게 보안을 강화해야 사람들이 안전하게 물건을 사용하지?'라고 생각하면 이건 서비스다. 기업이니까 '서비스'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사람 중심'이다.
HP 입사 때 이름이 '삼성휴렛팩커드'였다. 삼성으로 봐주니까 국내서 인기가 있었고, 해외에서는 HP로 대접받았다. 당시 HP는 혁신을 강조하는 첨단기업이었다. 난 경영학과 출신이다. 친구들 다 금융계로 진출하는데, 개인적으로 IT에 관심이 많아 HP에 입사했다. 앨빈 토플러 '제3의 물결'을 읽고 미래 사회가 IT 중심으로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분야에서 일하면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IT 업황이 워낙 다이내믹하게 발전했기 때문에 나는 정말 재미있게 일할 수 있었다.
-향후 전망
▲PC도 구독경제로 갈 것 같다. 안 사고 대여해서 쓴다. 구독경제는 서비스를 포함한다. 하드웨어만 하는 게 아니다. HP는 이미 기업용 PC 구독 서비스를 내놨다.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는 다양하다.
일단 구매 단계에서 금융을 제공한다. 우리 파이낸스 회사(휴렛팩커드파이낸셜서비스)에서 지불 유예 프로그램과 단기렌털 상품을 출시했다. 지금 PC를 빌려 쓰고 일정기간 돈 안내도 된다. 기업은 당장 돈이 없을 수 있다. 지금 우선 쓰고 나중에 갚으라는 것이다. 렌털은 통상 3년 기본인데, 1년짜리 렌털 상품도 만들었다. 코로나19로 힘든 기업을 돕기 위한 서비스다.
관리솔루션도 있다. 예를 들어 한 기업이 PC 3만대를 보유했는데 그중 몇 천대는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관리가 안 되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를 통해 PC를 관리하게 해주고 불필요한 하드웨어는 매각하도록 돕는다. 폐기 처리도 대신해준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보안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준다.
-2021년 HP코리아 계획은.
▲우선 우리 직원, 고객사, 협력사, 지역사회 건강과 안전을 보장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데이터 중심의 유연하고 효율적 조직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을 계속하려고 한다.
코로나19 확산 같은 어려운 시기에 재택근무, 재택교육 등 새로운 표준에 적응하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하려고 한다.
올해 HP는 HP코리아 임직원 성금과 미국 HP재단 추가 지원금을 더해 약 1억2000만원을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에 기부했다. 최근에는 굿네이버스와 협력해 5개 초등학교 저소득층 가정 아동들에게 노트북 20대를 기증했다. 내년에도 지역사회와 긴밀히 협력하고 공헌할 방법을 모색해 나가겠다.
○김대환 HP코리아 대표는
1992년 HP코리아 전신인 삼성휴렛팩커드에 입사해 퍼스널 시스템 그룹 소속으로 근무했다. 김 대표는 채널 세일즈, 마케팅 등 다양한 업무를 거치며 기업용 솔루션은 물론, 소비자용 솔루션까지 아우르며 HP코리아 성장에 일조해왔다.
한국 시장에서 성장을 인정받아 HP 말레이시아 법인 퍼스널 시스템 그룹장을 역임하며 동남아 신흥시장에서 HP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렸다.
2015년 11월, 휴렛팩커드가 HP코리아와 휴렛팩커드 엔터프라이즈로 분사하며 HP코리아 초대 대표이사로 임명됐다. 평사원으로 입사했다가 대표로 임명된 경우는 있으나, 업계를 떠나지 않고 한 길만을 걸으며 대표이사까지 오른 경우는 드물다. 'PC업계의 장인'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부산 브니엘 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거쳐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정리=김용주기자 kyj@etnews.com, 사진=김민수기자 ms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