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에 앞서 포항공대로 이동하기 위해 염한웅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 차에 오르자 영국 록그룹 오아시스의 'Hello'가 흘러나왔다. 록 음악을 좋아하냐고 묻자, 대학 때 밴드에서 베이스를 맡을 정도로 심취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울렸다. 돌려 말하지 않고 할 말은 반드시 하는 염 부의장 화법과 성격이 록 음악과 닮았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염 부의장은 거침없이 자신의 철학을 쏟아냈다.
남은 임기 최대 현안을 묻자 국가 연구개발(R&D) 패러다임 변화가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동안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추격형 R&D 비중이 높았지만 앞으로는 공공 문제를 해결하고 체감할 수 있는 성과로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재 전체 R&D 예산 중 5%에 불과한 공공 R&D 투자를 수년 내 세 배 이상 늘리고 장기적으로 30% 수준까지 높여야 한다고 방향성도 제시했다.
국가 R&D를 기초·원천, 공공, 산업이라는 큰 틀로 구분하고 성과 관리 체계도 혁신에 가까울 정도로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문했다. 특히 공공 R&D 성과 관리와 관련해선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이를 책임지는 책임기관을 도입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같은 내용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고, 정책화하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덧붙였다.
R&D 성과 검증 등 관리가 어려운 것은 애초 R&D 성격에 부합하는 목표 설정 자체가 제대로 돼 있지 않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R&D 투자 규모가 세계 수위권임에도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한다는 일각의 지적에 대해선 '어불성설'이라고 꼬집었다.
기초·원천 R&D 투자가 확대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오히려 투자에 비해 빠르게 우수 연구자가 나타나고 있다며 앞으로 연구의 질 향상을 위한 고민이 시작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을 맡은 지 3년 지났다. 그동안 변화, 성과는 무엇이고 남은 임기 현안은 무엇인가.
▲기초원천연구 예산을 확대했고 거버넌스 차원에선 통합 과학기술자문회의, 과학기술혁신본부가 출범했다. 각 부처 연구개발(R&D) 계획이 세부 계획 등으로 반영되고 예산으로 구현되는 데 이를 들여다보는 것이 과기심의회의다. 심의회의를 흡수, 통합 자문회의가 출범한 건 아주 큰 의미가 있다. 연구자 처우 개선 어젠다도 진전이 있었다.
앞으로 가장 중요한 현안은 R&D 패러다임 전환이다. 그동안 공공 기여가 미흡했다. 기업 등 민간이 나서 투자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공공 영역 R&D를 얼마나 투자하고 체계는 어떻게 구축해야 할지 등을 모색했고 어느 정도 결론을 냈다. 대통령 보고가 남았다. 어떤 방식이든 보고는 이뤄질 것으로 본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어젠다에 대한 공감대랄까, 좀 더 힘이 실릴 수 있는 상황이다. 이제 이행, 구현으로 넘어가야 한다.
-공공 R&D가 어떤 개념인지 자세히 설명한다면
▲현재 공공 R&D 개념, 구분이 아예 없다. 삶의 질 개선,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R&D 강화라는 측면에서 그동안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문제해결형 R&D를 시도했고 투자도 확대했다. 그러나 여전히 비중이 낮다. 미세먼지, 기후변화 등 R&D 투자 비중은 전체 R&D 예산 5% 남짓이다.
유럽연합(EU)은 R&D를 공공, 산업, 기초·원천으로 분류하고 30%씩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기초·원천 예산을 늘리고 있지만 여전히 10% 안팎이고 공공부문도 아직 미흡하다. 대부분 국방·산업 분야에 집중돼 있다.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민간 R&D 투자가 70조원에 이르는 상황이다. 정부가 민간이 잘하고 주도적으로 투자하는 영역에서 나와야 한다. 정부가 신성장동력을 만들어 산업을 주도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려야 한다.
국민은 기업 성장동력 확보보다 감염병 예방, 기후변화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 R&D 중 공공 R&D 비중이 너무 낮은 게 문제 인식 출발이다.
공공 R&D 예산을 늘리기 위해 R&D 전체 예산을 늘려야 하느냐. 그건 아니다.
총액을 늘리는 게 아니라 정부 역할을 축소할 부분을 찾아 산업 등 기존 R&D 투자 비중 등을 재조정해야 한다. 공공 R&D 예산은 수년 안에 세 배 정도 늘어나야 한다. 사회문제해결형 R&D 예산이 현재 1조5000억원 안팎인데, 이는 중소기업 R&D 지원 예산보다 작다.
-R&D 관리 체계도 변화가 필요할 것 같다.
▲감염병 백신 개발, 이산화탄소 저감 기술 개발 등 공공 R&D는 목표가 명확하다. 기초원천연구처럼 연구·인재 경쟁력을 쌓는 분야와는 성격이 다르다. 정부가 로드맵을 설정하고 목표를 달성해 나가야 한다. 효율성이 굉장히 중요하다. 현재 일부 사회문제해결형 R&D가 효율성 지적을 받는 것은 목표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공공 R&D 성과는 논문 발행 수 등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 미세먼지 저감이 목표라면 실제로 미세먼지 저감 기술이 나오고 저감으로 이어져야 성과가 나온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표 설정이다. 두루뭉술하게 기후변화 R&D를 강화하자고 말할 게 아니라 언제까지 어떤 기술을 개발할지 이정표를 설정해야 한다. 이어 단계별 목표를 설정하고 논문, 특허 성과가 아닌 실제 목표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로 성과를 검증해야 한다.
R&D에서 성과 검증이 굉장히 어려운 측면이 있는데 목표가 명확하면 성과검증도 간단해진다. 다음은 누가 목표를 설정하고 성과를 검증하느냐 문제가 남는다. 공공 R&D는 대다수가 다부처 사업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 R&D는 여러 주체가 이행하되 주관 또는 책임부처를 정해야 한다. 연구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연구소, 대학이 연구에 참여하겠지만 이를 총괄하는 기관은 반드시 정해야 한다. 책임연구기관을 정해서 성과를 검증해야 한다.
3개 출연연이 과제를 나눠 수행한다면 한 기관은 책임기관이 돼야 한다. 이런 방식은 기초원천 R&D에선 부적절하지만 반대로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R&D에선 필요하다.
국민 요구와 컨센서스가 있는 R&D는 시작하고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컨트롤타워도 필요하다고 본다. 책임 운영 부처, 기관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은 민간 전문가로 구성한 기구가 역할을 해줘야 한다. 과기자문회의 내 특위를 구성해 연구 목표, 예산 등을 들여다보면서 피드백을 주는 구조를 생각하고 있다.
-정부 R&D 전체 구조는 어떻게 변화해야 한다고 보나.
▲기초·원천, 공공, 산업이라는 큰 틀에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그동안 산업 먹거리를 찾는 R&D에 치중한 것이 사실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민간 R&D 투자가 활발한 상황에서 정부는 이제 다른 역할을 찾아야 한다. 정부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는 공공, 기초·원천 분야다.
산업 R&D 부문에선 정부 역할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이 있어야 한다. 역할, 목표 등에 대한 명확한 설정이 필요하다. 이런 것이 분명해지면 평가 또한 굉장히 쉽고 명료해진다.
출연연도 현재 목적과 역할, 미션이 불분명한 측면이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각각 출연연을 비슷한 잣대로 평가한다. 현재 평가체계로 출연연 성과를 따지는 게 과연 적합할까.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는 근거 자체가 희박하다.
-기초·원천 R&D 예산이 매년 증가하고 있는데 현장 체감은 어떤가.
▲기초·원천 R&D 예산은 2조4000억원까지 증가한다. 이후에도 늘어날 텐데 현장 연구자와 얘기를 해보면 체감하지 못한다는 답변이 많다. 개개인이 받는 연구비가 늘었냐, 그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 중견 연구자가 받는 연구비가 많지 않았다. 중견 연구자 R&D 과제가 대폭 늘어났고 증액 예산은 상당 부분이 여기로 흡수됐다. 신진연구자는 특히 체감할 만한 변화가 없다고 느낄 수 있다.
연구과제를 어떻게 배분할지가 관건이다. 학문별 연구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R&D 예산을 배분하는 방식을 도입했고, 실제 이행 중이다. 이를테면 수학, 물리 분야 연구자 수요를 파악해 연구비를 배분하는 방식을 달리하는 것이다. 수학 분야는 이미 이 방식을 도입했다. 현재 물리, 화학 분야도 논의 중이다. 한국연구재단에서 맞춤형 연구비 배분 방법을 찾고 있다. 기계적 배분에서 벗어나 질적 측면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거다. 앞으로 상당한 시간이 걸릴 테지만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이른바 학문 분야별 블록펀딩인데 제대로 이행돼야 한다.
-정부가 디지털·그린 뉴딜을 추진하고 있는데 R&D 측면에서 보완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과학기술 정책을 자문하는 입장에서 디지털·그린 뉴딜 전반을 평가하긴 어렵다. 방향성은 적절하다. 선제 투자하는 것은 옳아 보인다. 다만 R&D에 국한에서 보면 목표가 명확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미래지향적이라 방향성은 적절한데 R&D 구체적 내용이 좀 부족해 보이기도 한다.
-올해도 노벨상 수상자 발표에 맞춰 국내 여론이 들끓었다.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해서 실망도 컸는데 우리나라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어떻게 보고 있나.
▲우리나라가 R&D에 적극 투자를 하고 있지만 기초·원천 부문 투자는 그동안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왜 성과가 나오지 않느냐고 질책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동안 R&D 방향성은 산업을 일으켜서 국가 경쟁력을 제고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런 상황에서 노벨상 수상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은 결이 맞지 않는다. 대신에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분야에서 산업 경쟁력이 올라가지 않았나.
기초·원천 R&D 투자가 본격화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 조금 더 시간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 거꾸로 투자에 비해선 성과가 좋다고 본다. 아주 빠르게 성과가 올라오고 있다. 논문 인용 지수에 따르면 세계 상위 30인 안에 계속 우리나라 연구자가 포함되고 있다. 그중에서 많게는 20% 정도가 향후 노벨상을 노릴 수 있다. 노벨상에 아예 범접도 못 하던 상황과 비교하면 빠르게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
과제도 분명 있다. 지금까지 기초·원천 R&D 예산을 확대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제는 어떻게 빨리 질적 향상을 이룰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를테면 양적 확대 정책에서 질적 성장을 위한 고민으로 넘어갈 단계라고 본다. 우리는 기초·원천 R&D를 확대하는 게 정책 목표라면 유럽은 '우수한' 기초·원천 R&D에 투자하다는 게 목표다. 우수하고 독창적 R&D를 할 수 있는 단계가 돼야 한다. 아직 그 고민은 부족하다.
염한웅 부의장은....
염한웅 부의장은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호쿠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연세대, 포스텍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2017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으로 위촉돼 문재인 정부 과학기술혁신 정책을 주도하고 있다.
고체물리학 연구자로서, 특히 금속 원자선 전자물성 분야를 창시하고 세계적 분야로 확립한 석학이다. 200편 이상 논문을 발표하고 금속원자선을 활용하는 새로운 정보처리방식인 솔리토닉을 주창했다.
미국물리학회와 한국과학기술 한림원 펠로우(Fellow)로 선임되었으며 2015년 한국과학상, 2016년 인촌상, 2017년 경암상 등 주요 국내 과학상을 수상했다.
최호기자 snoop@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