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과학책을 적잖이 읽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현대과학사에서 출간된 4권짜리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동물이야기' 시리즈도 한 번쯤은 펼쳐 보았을지 모른다. 1990년대 어린이용으로 출간된 과학책 중 상당히 기묘한 책에 속하니만큼 혹시라도 읽은 적이 있다면 기억해내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스라는 이름의 소년이 동물학자 아마이젠하우펜 박사와 세계 곳곳을 탐험하며 각종 동물을 만난다는 개략적인 내용까지는 어린이를 위한 과학 서적의 보편적인 줄거리와 일치하지만, 그런 책에서 소개하는 동물이 거북 등딱지를 단 새나 날아다니는 원숭이처럼 기묘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인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
이것이 1권과 2권에 해당하는 내용인데, 3권부터는 또 책의 분위기가 갑작스레 바뀌어 버린다. 박사의 이름이 바뀌지를 않나, 신화 속에나 나올 법한 괴생물체 대신에 나비의 한살이나 마다가스카르 섬의 멸종한 코끼리새처럼 상대적으로 평범한 동물 이야기가 태연하게 계속되지를 않나. 이것이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일까? 사정을 알고 보면 간단한 일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어린이용 서적 중에는 외국책을 단순히 불법으로 번역하는 것으로 모자라 제멋대로 뜯어고쳐 놓은 해적판이 적잖이 있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동물이야기도 실은 그런 경우에 속한다.
뒤쪽 두 권은 독일의 과학작가 헤르베르트 벤트가 쓴 책의 내용을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더욱 환상적인 앞쪽 두 권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정체는 사실 과학책조차 아닌 현대미술 작품이다. 책에 실린 수많은 신기한 동물의 박제와 스케치와 X선 사진 등은 전부 스페인 국적의 예술가인 호안 폰트쿠베르타가 1987년 전시 '동물상(Fauna)'을 위해 꾸며낸 물건으로, 이 전시 내용을 정리한 책이 어쩌다 보니 한국에서 진짜 과학책인 것처럼 출판된 결과가 바로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동물이야기'의 앞쪽 두 권이다. 존재하지 않는 연구자의 일대기를 가능한 설득력 있게 꾸며내려 가짜 동물 울음소리며 인터뷰 영상까지 준비했던 폰트쿠베르타의 노력이, 전시회가 열린 적조차 없는 한국 땅에서까지 그 빛을 발했다고나 할까.
비슷한 사례가 또 있다. 1988년 과학동아에는 '코로 걷고 먹이를 잡는 기이한 동물' 비행류(鼻行類)가 태평양의 하이아이에이 군도에 살다가 비밀 핵실험으로 멸종하고 말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동안 한국 인터넷상에서 진위 여부를 놓고 무수한 논쟁을 낳기도 했던 '비행류'는 사실 독일 동물학자 게롤프 슈타이너의 책에 등장하는 순전한 창작물이다. 문제의 책은 2011년 '코걸음쟁이의 생김새와 생활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는데, 코로 걸어 다니는 가상의 포유동물에 대해 온갖 전문용어와 상세한 해부학적 설명을 곁들여 가며 뻔뻔하게 설명하는 것을 읽고 있자면 수많은 사람이 깜박 속은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러니까 비록 한국에는 진짜 과학책이나 기사인 것처럼 처음 소개되었지만, 폰트쿠베르타의 '동물상'과 슈타이너의 '코걸음쟁이의 생김새와 생활상'은 모두 일종의 SF 작품이었던 셈이다. 매력적인 등장인물이나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신기한 연구 주제와 과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것이 허구인지 아니면 실제인지조차 헷갈리게 만드는 그럴듯함을 무기 삼아 독자를 사로잡는 SF 말이다. '그럴듯함'을 추구하려면 일단 겉포장이 중요한 법이라, 이러한 작품은 내용만큼이나 그 형식에도 심혈을 기울인다는 특징이 있다.
이를테면 시공간에 걸친 분자 구조 때문에 물에 닿기도 전에 녹아버리는 신비의 화학물질을 다룬 아이작 아시모프의 '재승화 싸이오티몰린의 시간내재성'은 과학 논문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왔고, 미래의 고령화 문제 해결책을 다룬 곽재식의 섬뜩하고 유머러스한 풍자 단편 '200세 시대 대응을 위한 8차 산업혁명 기술 기반 컷 앤 세이브 시스템 개발 제안서'는 제목 그대로 제안서 형식을 본뜬 소설이다. 각종 초자연적인 물체와 현상을 연구하는 조직에 대한 인터넷 공동 창작 프로젝트 'SCP 재단' 역시 각 문서가 재단 내부 보고서라는 틀에 맞춰 적혀 있다. 전부 실제 학술지나 공공기관 홈페이지, 아니면 어느 비밀스러운 조직의 문서함에서 발견되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혹시라도 정말 그런 곳에서 SF의 파편이 발견될 경우, 우리는 과연 실제 문서와 허구의 산물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해 보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동물이야기'와 과학동아의 비행류 기사가 일으킨 해프닝에는 사뭇 오싹한 부분이 있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내용을 담은 SF가 단지 눈에 보이는 형식의 그럴듯함 덕택에, 그리고 그 내용 전부가 창작물이라는 말이 따로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여러 사람을 속여 넘긴 사례니까. 한참 세월이 지난 뒤에나마 출처가 밝혀지지 않았더라면 아직까지도 이 두 편의 SF는 번듯한 과학적 사실인 척 세상을 활보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바야흐로 '가짜 뉴스'가 화두인 시대, 친척이 보낸 걱정 어린 메시지나 누군가 게시판에 갈무리해 둔 뉴스 기사 내용을 바로 믿지 않고 경계하는 것이 중요한 소양이 된 시대다. 미국에서는 악명 높은 큐애넌(QAnon) 음모론 신봉자 마조리 테일러 그린이 하원의원으로 당선됐고, 한국에서도 총선 결과에서부터 유명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각종 주제에 대한 음모론을 어디서나 접할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과거 우연히 한국에 소개되었던 SF 두 편이 본의 아니게 가르쳐 준 교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현실의 옷을 걸친 허구는 때론 현실을 침범할 만큼 강력할 수도 있다.”
이산화 소설가
GIST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는 물리화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온라인 연재 플랫폼 브릿G에서 '아마존 몰리'가 2017년 2분기 출판지원작에 선정되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증명된 사실'로 2018년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