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국가 연구개발(R&D) 투자 100조원 시대가 열리는 첫 해다. 미국·중국·일본·독일에 이어 세계 다섯 번째 100조원 클럽 가입이라는 이정표를 세운다.
역설적이지만 R&D 투자 환경은 최악이다. 코로나19 펜데믹과 글로벌 밸류체인(GVC) 재편 등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계 제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국가 R&D 80%를 담당하는 민간의 투자 활력이 떨어졌다. 새로운 성장동력도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우선순위에서 제외된 사회 문제 해결에 대한 요구는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새로운 R&D 전략, 나아가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하다. 민간이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할 수 있도록 마중물을 제공하고 그동안 우선순위에서 밀려있던 기후변화, 감염병, 미세먼지 관련 R&D 투자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민간 R&D 투자 활력 사수해야
2019년 기준 국내 R&D 투자는 89조471억원이다. 이 중 77%인 68조5000억원이 기업 등 민간에서 이뤄졌다. 민간 투자액 비중은 일본(79%)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이다.
국가 R&D에서 민간 비중이 절대적이지만 투자 활력은 점차 약화되는 추세다. 연평균 투자 증가율은 최근 20년 10.8%에서 최근 10년 9.2%, 최근 5년 8.9%로 감소했다. 특히 2019년 투자 증가율은 3.8%로 최근 10년 내 두 번째로 낮은 수준이다.
코로나 19 펜데믹이 덮친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 불확실성 증대로 어느 때보다 투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가 지난해 발표한 '2021년 연구개발 투자 및 연구인력 채용 전망(KOITA RSI:R&D Sentiment Index)'에 따르면, 올해 기업 R&D 투자 RSI는 91.2, 인력 RSI는 91.6으로 집계됐다. RSI는 올해 투자나 인력 채용 규모를 100으로, 내년도 규모를 예상한 지표다. 100보다 작으면 내년 투자가 올해 대비 줄어든다는 의미다.
대기업 RSI는 투자와 인력 부문 각각 96.2, 94.1이다. 대기업 지표가 100 미만으로 내려간 것은 2013년 조사 시작 이래 처음이다. 중견기업과 중소기업은 86~91 정도 투자·인력 RSI 값을 보였다.
2019년 기준 대기업은 우리나라 전체 R&D 투자 50%, 중소기업은 고용 83%, 연구원 58%를 책임졌다. 이를 감안하면 올해 R&D 투자는 물론 관련 일자리가 상당수 감소할 수 있다.
민간 투자 활력을 되찾는 게 급선무다.
R&D 관련 불필요한 규제와 부담을 줄이고 인센티브와 투자자금을 확대해 R&D 투자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다. 정부 R&D에 참여하는 기업이 원하는 대로 연구할 수 있도록 정부 R&D 사업 접근성, 시장성도 제고해야 한다.
연구실에 머무르고 있는 연구성과를 시장으로 나오도록 해 사업화와 기술기반 창업을 활성화하는 것도 과제다. 무엇보다 당장 나서기 어렵지만 미래를 선도할 잠재력을 가진 분야는 정부가 장기적 관점에서 전략을 수립하고 마중물 투자를 집중해 달라는 게 기업 목소리다.
정부도 민간 R&D 투자 활력 제고를 위해 다각도 지원에 나선다.
기업 연구 행정부담을 줄이기 위해 연구비 집행 자율성을 확대한다. 세부 연구목표 변경을 허용하고 평가는 2~3년 주기로 전환한다. 인공지능(AI), 바이오헬스 등 신산업 분야 선제 규제혁신 로드맵을 마련, 규제 요인을 사전에 정비한다.
민간 재원으로 5000억원 규모 '기술혁신 전문펀드'를 조성하고 투자회사가 먼저 투자하면 정부가 최대 두 배까지 매칭 투자하는 R&D도 본격화한다.
상용화가 중요한 정부 R&D에서 민간 역할도 확대된다. 민간전문가가 사업의 전권과 책임을 갖고 도전적 목표 달성에 매진하는 연구개발모델(K-R&D Model)을 제도화한다.
중소·중견기업과 지역 R&D 역량도 강화한다. 4만여개에 이르는 기업부설연구소를 진단해 역량(잠재형연구소, 도약형연구소, 선도형 연구소)에 따라 맞춤형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선진국 R&D로 패러다임 전환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제3차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전원회의에서 “민간 R&D 역량이 궤도에 오르지 않은 과학기술 분야에선 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하고, 세계 수준으로 봐도 손색이 없고 오히려 앞서나가는 많은 분야는 과감히 민간기업에 맡겨야 한다”고 역설했다.
국가 과학기술 역량을 정부가 주도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할을 정립하라는 취지다.
지금까지 R&D는 경제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주로 인식돼 왔다. 정부도 경제적 목적 R&D에 매년 50% 내외로 집중 투자했다. 성장 일변도 R&D 전략을 구사하면서 반도체 등 주력산업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정부·민간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아 중복 투자, 불필요한 경쟁 등 비효율도 발생했다.
반면에 감염병과 기후변화 등 사회 난제 해결 R&D 투자는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선진국 기술을 쫓는 추격형 전략을 구사하면서 사회 문제 해결엔 상대적으로 투자가 미흡했다.
지난해 감염병, 미세먼지, 기후변화 3대 분야 R&D 예산은 1조5000억원으로, 총 R&D 예산 6%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회 난제로 인한 피해 규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정부는 코로나19로 경제 피해 67조원에 일자리 67만개 이상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현대경제연구원은 2018년 미세먼지로 인한 경제 손실을 4조원으로 추정했다.
우리나라보다 앞서 R&D 투자 100조원 고지를 밟은 미국이나 유럽연합(EU)은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거대한 국가·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한 R&D 투자를 과감하게 늘리는 추세다.
지속 가능한 발전을 저해하는 사회적 도전과제의 해결을 위해 관련 R&D 투자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산업 발전과 사회의 전환적 혁신을 동시에 모색하고 있다. 기후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자동차 배출 가스는 규제하면서도 신기술 개발에 집중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민간 R&D 역량과 투자가 크게 증가한 국가 R&D 100조원 시대 과학기술 정책과 정부 R&D 투자가 국민의 건강과 안전, 쾌적한 삶 실현을 최우선에 두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이와 관련, 과기자문회의도 문 대통령에게 국가 R&D 투자에서 사회 문제 해결 비중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자문했다. 지난달 전원회의에서 기후변화, 감염병, 미세먼지 등 3개 난제 해결 R&D 예산을 지난해 1조5000억원 대비 2025년 세 배까지 늘리고 고령화, 폐플라스틱, 재난·재해, 독성물질 등 분야 연구 또한 지속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R&D 성과 확산을 위해 수행 체계 개선 방안도 제시했다. 총괄부처와 책임연구기관 중심으로 여러 주체가 연계·협력하고 경험과 성과를 축적, 확산하는 게 골자다.
최호기자 snoop@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