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새로운 개념이 필요한 시대

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외국 매체는 우리 경제가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최고 성장률로 국내총생산(GDP) 규모 세계 10위권 안으로 진입할 것을 전망했다. 1인당 국민소득도 사상 처음으로 G7 국가의 하나인 이탈리아를 넘어설 것으로 예측했다. 경제 성장의 배경에는 국민 성실성, 부단한 노력, 국가 정책이 한몫했다. 1960년 대비 1700배에 이르는 GDP 성장은 무엇보다 과학 기술 발전이 가장 큰 동력으로 작용했다.

40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진화해 온 기술 발전 단계를 필자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연구 현장에 합류한 30대 초반 시절부터 60대 후반까지 겪은 변화 중심으로 대략 10년 단위로 정리해 본다. 처음 연구 현장에 발을 내디딘 1980년대는 선진국 제품을 베끼는 역공학(분해공학) 시대였다. 역공학으로 축적한 지식과 양성된 인력으로 1990년대에는 표준규격 구현 단계에 들어섰다. 2000년대 들어서 비로소 신제품을 설계하고 시스템통합(SI)을 통해 신성장 동력을 창출하는 서비스를 만들어 냈다. 현재는 4차 산업혁명을 맞아 '파괴적 혁신'이라는 말을 인용, '새로운 개념 창출'의 시대가 왔다고 정리한다.

필자는 1986년 ETRI에 들어와 행정전산망용 주전산기(타이컴)를 만드는 대형 국책사업에 합류했다. 행정전산망에 들어가는 중형컴퓨터다. 해외에 의존하던 컴퓨터 기술을 연구진의 손으로 만들어 슈퍼미니급 중형컴퓨터 시장에서 선진국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그 이전에 슈퍼마이크로급 소형컴퓨터를 만들던 연구진은 외국의 슈퍼 미니급 컴퓨터 시스템을 뜯어보고(타이컴 1) 참조하는(타이컴 2) 등 역공학으로 컴퓨터를 만들었다. 전전자교환기(TDX-1)도 일부 역공학의 산물이었다.

그동안 경험이 축적돼 1990년대에는 우리 힘으로 새 시스템 규격을 구현할 수 있게 됐다. 기존에 만들어진 국제표준규격을 바탕으로 스스로 연구 결과물을 만들 수 있었다. 연구자는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개념이 잡혔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지가 불탔다. 디지털 이동통신 국제표준규격을 적용한 시제품을 만들어 세계 1위를 한 것이다.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서비스가 대표 사례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라는 경제 위기를 거쳐 2000년대가 되자 기존 경험을 바탕으로 새 서비스를 창출하는 시스템 '설계'가 가능해졌다. 이동하면서 쓰는 무선 인터넷 '와이브로'(WiBro)와 내 손안의 TV '지상파 DMB' 방송 서비스가 좋은 예다. 물론 기존 기술을 개량·개선한 것이다. 원천기술은 미국 전기전자공학회(IEEE) 표준이나 유럽표준기술 바탕으로 서비스를 창출하고, 개선된 국제표준을 만들어 낸 단계였다.

ETRI는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최근 새로운 개념인 6세대(6G) 이통 서비스 기술을 차기 중점과제로 선정, 과감히 투자할 계획이다. 이제 신개념을 만들지 못하는 기술은 연구로서 큰 의미가 없다. 바로 '선도자'(퍼스트 무버)로 가는 길이다. 필자는 연구자로서 새로운 도전은 아니더라도 '내 생각을 과감히 꺼내는 일', 즉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는 일이라 주장한다.

이후 단계는 새 개념을 국제화를 통해 견고하게 하는 일이다. 국내에서만 통하는 기술은 더 이상 의미가 없고 국제 사회에서 통해야 새로운 개념인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이로써 세계 관계자들로부터 우리가 전문가 그룹이라 인정받는 국제 연구실도 만들 수 있다. 기술상으로 SI나 이전에 없던 서비스를 만드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21세기 세계 톱10 국가에서 한 걸음 더 큰 도약을 위해선 이젠 각자 새로운 생각을 꺼내 창의 연구에 도전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미 자격과 실력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joonkim@etr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