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디스커버리 시행 우려로 성과를 외부에 알리지 않으려 합니다.”
한 국내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인의 얘기다. 이 기업인은 소부장 국산화의 첨병으로 주목받고 있는 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회사는 해외 의존도가 높은 제품 국산화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러나 외부에 기술을 알리는 홍보 활동은 최소화하기로 했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K-디스커버리 제도 법제화 이후 펼쳐질 상황을 크게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K-디스커버리는 새로운 증거 수집 제도다. 각종 특허 재판에서 법관이 지정한 전문가가 피고의 생산 설비 등을 방문해 증거를 수집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특허청 주도로 추진되고 있다.
국내 반도체 소부장 업계는 이 제도에 크게 우려하고 있다. 해외 소부장 업체들이 국내 회사에 무차별 특허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다.
반도체 공정은 각 절차와 규격이 대동소이해서 소부장 회사별로 비슷한 기술이 개발되는 경우가 많다. 외국 기업들은 특허를 무기로 한국 업체들의 시장 진입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기존에는 우리 업체가 증거를 제출할 의무가 없었기 때문에 숱한 고비를 넘기면서 기술 개발을 이어 왔다.
그러나 K-디스커버리가 시행되면 해외 업체들이 증거 수집을 이유로 국내 업체의 설비 상황을 시종일관 엿보면서 수월하게 견제하는 수단이 될 것이란 주장이 나오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외국 기업에 더 유리한 제도를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것 같아 아쉽다”면서 “합리화 제도인 건 알지만 열위에 있는 우리 기술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 줬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특허청은 K-디스커버리가 지식재산 베끼기 관행을 바로잡을 수 있는 제도라고 주장한다. 특허청은 업계 의견을 수렴, 올 상반기까지 이 제도를 수정·보완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국내 소부장 업계의 마음을 얻기에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합리화 제도 마련도 중요하지만 우리 기업의 생존과 소부장 생태계 확대를 위해 울타리를 만들어 주는 것도 정부의 역할이다. 무차별 특허 공격 우려로 회사 소개마저 망설이는 중소 소부장 업체들의 고민을 먼저 경청하는 것이 필요하다.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