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한국전기통신공사가 발행한 전화번호부를 기억하는가. 기억한다면 필자와 같은 세대다. 당시 종이책 가운데 글자가 가장 작으면서도 두꺼운 책이다. 집 전화에 가입한 사람의 이름·주소·전화번호가 기재돼 있다. 요즘 세상이라면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엄벌에 처해진다.
이웃과의 협력이 절대 필요하던 농경사회에서는 마을공동체와 생사를 함께했다. 옆집의 자녀는 몇 학년인지, 수저는 몇 벌인지, 호미는 몇 개 있는지 등 속속들이 알고 지내던 시절이었다. 자연스럽게 개인정보 공유가 이뤄졌다.
그러다가 산업화·개인화가 진행되고 직장을 달리하는 이웃이 늘면서 사생활이 중요해졌다. 정보화 시대가 도래해 인터넷·스마트폰 등 정보통신기술(ICT) 발전으로 편리함을 얻었지만 보이스피싱 등 범죄 목적의 개인정보 침해로 사생활 불안감도 높아졌고, 피해 예방과 구제가 중요해졌다.
지능정보화 시대에서는 데이터, 인공지능(AI) 알고리즘 활용으로 고객의 기호·성향까지 파악해 맞춤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는 등 개인정보 보호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법제 정비도 이뤄졌다.
1단계로 정보통신망 확충을 주된 과업으로 하던 정보통신망법은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에게 엄격한 개인정보 보호 의무와 책임을 부여하고, 위반하는 경우 제재나 형사처벌 등 근거 조항을 추가했다. 신용정보법도 금융기관으로부터 고객의 신용정보를 보호하는 근거 조항을 도입했다.
2단계로 개인정보보호법을 제정해 공공과 민간을 통합하고, 오프라인의 개인정보 처리자에도 개인정보 보호 의무와 책임을 부과했다. 3단계로 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신용정보법의 중복 유사 조항을 통합·정리하면서 가명정보 등 산업 연구를 위한 활용 기회를 제공하고 개인정보보호법을 개인정보에 관한 기본법으로 만드는 입법을 단행하는 한편 독립된 규제기관으로서 개인정보보호위원회를 설치했다.
AI 시대 민주주의를 위해 개인정보는 어떤 의미를 띨까. AI 시대에는 국민이 국가나 기업·언론에 구속되지 않고 대등한 지위에서 얻은 다양하고 풍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자신의 의사를 형성, 결정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전제 조건으로서 국민 개개인의 정보가 철저히 보호되고, 침해받지 않고 악용되지 않는 시스템이 작동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정신 인프라가 되기 위한 개인정보의 법제 방향을 보자.
첫째 국민이 어떤 환경에서도 침범될 수 없는 개인정보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공개될 경우 사회생활의 약점이 될 수 있는 의료, 건강, 성적 취향, 가족관계 등 민감한 정보가 그것이다. 물론 공공·민간 서비스 이용을 위해 부득이하게 제공된 민감한 정보가 있다면 그 목적과 범위 내에서 최소한으로 이용되고 철저히 보호돼야 한다. 자신의 사생활이 유리알처럼 노출되는 사회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형성, 결정하고 표현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둘째 국민의 데이터형성권을 보호해야 한다. 발달한 기술 지원으로 국민 개개인의 창작 활동이 쉬워졌고, 많은 데이터를 생성하고 있다. 개인이 창출한 데이터는 성격과 유형, 표현 방식과 기술에 따라 저작권·상표권·특허권 등 다양한 지식재산권으로 보호받는다. 창출, 보호, 활용의 전 과정을 효과 높게 지원하는 범정부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셋째 국민 스스로 개인정보 보호 역량과 실행력을 높일 수 있도록 지원 체계를 갖춰야 한다. 정부·기업 주도의 개인정보 보호 체계는 정보 주체를 온실 속의 화초로 만들 위험성이 있다. AI 시대는 쏟아지는 데이터와 복잡한 AI 알고리즘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정부·기업 중심의 보호 체계가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법률로 보장된 개인정보 열람·정정·삭제 등 청구권을 정보 주체가 스스로 행사하기 쉽게 법제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개인정보 시스템에서 수동형 보호 대상에 머물러 있던 개인정보 주체의 지위를 능동형 보호 활동 주체로의 위상 재정립을 하는 것이 개인정보법제가 AI 시대 민주주의를 위해서 해야 할 첫걸음이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AI-지식재산 특별전문위원회 위원장) sangjik.lee@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