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Planning)'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대상에 대해 그 대상의 변화를 가져올 목적을 확인하고,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해결책을 설득력 있게 논리적으로 설계하는 것이다. 조직 내 모든 일이 기획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기업경영뿐만 아니라 국가 연구개발 사업에서도 기획은 어떤 과정보다도 중요하다.
정부 연구개발 사업의 투자 규모가 지속 증가하고, 사업 특성도 복잡다양해지고 있다. 개별 부처 중심의 기존 연구개발 수행 방식만으로는 급변하는 과학기술 수요 증가 및 다양성에 적절하게 대응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함과 아울러 연구 투자의 중복 및 비효율성을 방지하기 위해 부처 간 협업에 기반을 둔 다부처 연구개발 공동사업(이하 다부처 R&D)이 점차 늘고 있다.
융합, 개방이라는 패러다임 변화에 부응해 부처 간 협업으로 시너지 효과 및 투자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중앙 부처들이 공동으로 연구개발을 기획, 추진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상황이다.
추진 과정에서 총 사업비 규모가 500억원 이상의 대형 연구개발 사업으로 진행될 것이 예상되는 다부처 R&D의 특성상 예비타당성조사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치게 된다. 그런데 선행연구 및 상세기획 과정을 거쳐 다부처 R&D 과제로 추진하는 일부 사업의 경우 예비타당성조사 단계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부처 R&D와 관련한 국가연구개발 관련 주요 문헌 및 토론회에서도 거버넌스의 체계적 검토, 부처 간 실질적 협력·조정 체계, 연구개발 성과의 활용 방안, 법제도적 해결 방안 등에 대한 구체적 제시가 미흡함을 문제점이자 개선 방안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문제는 충분히 해결되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다부처 R&D 취지에 충실한 기획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는 '기본과 원칙에 충실하자'(back to the basics and principles)는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부처 R&D로 추진하는 기본적 이유는 부처 간 칸막이나 이해관계 또는 장벽을 넘어 범부처 간 연계 협력을 통해 당면한 사업 과제들에 대한 통합 관리가 필요하다. 나아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부처 R&D의 근본적 목표는 부처 간 협업으로 인한 시너지 효과 및 투자 성과의 극대화이다.
근본적 사업 목표에 충실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 준비는 연구개발을 실질적으로 통합관리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갖춘 추진 체계와 더불어 부처 간 협력, 소통 체계 구축, 성과 관리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이 기획 단계에서 충실하게 반영돼야 한다. 다부처 R&D를 통한 기술 개발 이후의 실증 방식, 즉 실제 누가·언제·어디서·어떻게 기술 개발 결과를 적용·활용하는가에 대한 경로가 명확하지 않을 경우 연구 성과 활용이 흐지부지되거나 특정 부처로 제한될 수 있다.
기획은 제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행을 전제로 해야 한다. 기획서 실행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기획서가 구현되는 연구 현장이나 참여 기업들의 현실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상식이나 통념을 바탕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충실하지 않은 기획을 실행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실행할 것을 기획해야 한다. 제반 상황에 대한 분석과 철저한 고려를 하지 않으면 그러한 기획안은 탁상공론에 그칠 공산이 크다. 실행 단계에서 다수의 수정 및 보완이 뒤따르게 되고, 결과적으로 미진한 사업 성과 및 예산 낭비로 이어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연구 현장 및 실행 과정을 도외시하는 탁상공론적인 기획이 아닌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고 필요한 세부 과제를 기반으로 하는 기획이 이뤄져야 한다. 다부처 R&D의 실질적 추진을 위한 법·제도적 정비와 실효성 있는 추진 체계 및 실행안을 제시하는 건실한 기획이 뒷받침되길 기대해 본다.
최진호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 jhchoi@sejo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