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기차 배터리 산업은 이미 위기에 처했다. 최근 2~3년전부터 우리나라 제품이 시장점유율 1위 자리에 오르면서 'K-배터리'라는 별칭까지 붙었지만, 지금의 국산 배터리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전기차 배터리는 보통 실제 신차가 출시되기 3~5년 전에 수주가 이뤄진다. 지금의 국산 배터리 시장 점유율은 과거 경쟁사가 많지 않았을 적에 입찰 경쟁에서 따낸 결과다. 그러나 1년 전부터 글로벌 완성차의 전기차 배터리 수주전에서 중국산이 크게 앞서고 있으며, 심지어 유럽산 제품까지 과거 한국산 자리를 꿰차고 있다.
국산 배터리는 모듈이나 팩 제작 공정을 생략한 새로운 개념의 '셀투팩(Cell to Pack)' '셀투카(Cell to Car)' 같은 혁신 제품은 물론 에너지 밀도와 안전성 등 기술 발전에도 밀리는 추세다. 현대차에 이어 국산 배터리를 탑재한 제너럴모터스(GM)와 포드·르노·BMW·폭스바겐 등 일부 전기차 모델에서 배터리 시스템 화재 위험이 감지돼 또 한번 크고 작은 리콜 사태를 앞두고 있어 국산 배터리의 이미지 타격은 당분간 계속될 조짐이다.
◇배터리 주도권 바꿨다
전기차 시장이 확대되면서 배터리 주도권이 바뀌고 있다. 과거 전기차 배터리는 용량, 규격 등만 맞으면 그대로 가져다 썼지만, 이젠 완성차 업체가 배터리 형태는 물론 셀, 모듈·팩 생산까지 직접 챙긴다.
폭스바겐의 경우 과거 차량 내 주어진 공간에 원하는 스펙만 갖추면 공급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난 15일(현지시간) 폭스바겐그룹은 2030년까지 연간 240Gwh 규모 배터리 독자 생산 계획과 함께 전체 전기차 생산분의 80%를 자체 규격 각형 배터리를 개발, 이 배터리만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또 배터리 셀도 구분해 고급형 모델에는 리튬이온 삼원계(NCM)를, 보급형과 저가형은 각각 하이 망간계열과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채택하기로 했다. 여기에 배터리 개발·생산 내재화까지 선언하면서 앞으로는 폭스바겐이 직접하거나 합자사를 통해서만 배터리를 확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가장 피해를 받은 건 국산 배터리 업체다. 각형 업체인 삼성SDI는 다른 업체에 비해 반등 기회가 있긴 하지만, 폭스바겐의 독자 행보 선언 직전까지 국내 업체는 아무런 손을 쓰지 못했다.
반면에 중국 업체는 각형 도입에 대비한 배터리 팩 소형화(에너지밀도 향상)와 리튬인산철(LEP)의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전략으로 이번 폭스바겐 비전 발표에 이미 확보된 중국의 배터리 기술이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배터리 업체 관계자는 “폭스바겐 '파워 데이' 이후 국내 배터리 업계는 향후 각형 이외의 20% 발주에만 관심을 두거나, 갑작스런 선언에 불만을 토로할 뿐”이라며 “각형이나 셀투카·셀투팩 전략이 다른 완성차 업체까지 표준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는 전혀 하지 않고 있다”며 국산 배터리 업계가 아직 위기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폭스바겐·테슬라 기준된 중국 배터리
“다년간에 걸쳐 중국 업체에 기술을 이전하게 되지만, 수년 후에는 기술평준화로 배터리 셀 기술은 더 이상 대단한 핵심 경쟁력이 아닐 것이다.”
지난 2015년 국내 배터리 업체가 중국 업체와 현지에 전기차용 배터리 합작공장을 지을 때 배터리 기술 유출을 우려한 기자 질문에 대한 이 회사 고위 관계자가 했던 말이다.
이 관계자의 말대로 5~6년이 지난 현재 중국 배터리 업체는 한국과 일본 업체로부터 이전 받은 기술로 완성도 높은 배터리 셀 개발은 물론 자국 내 풍부한 원료(광물)를 무기 삼아 국산 배터리 이상의 경쟁력을 확보했다.
최근 배터리 내재화와 함께 독자 규격의 배터리를 선언한 전기차 업계 1위 테슬라와 완성차 업계 1위 폭스바겐 모두 중국의 기술을 향후 배터리 전략 핵심으로 삼았다.
두 회사 모두 차종 모델에 따라 리튬이온 삼원계(NCM)계열과 주로 중국업체만 생산하는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모두를 채택하기로 했다. 두 회사의 배터리 방식 역시 큰 범위의 '금속 각형'을 택한 것도 중국만의 기술이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테슬라의 중대형 원통형 배터리 '4680'과 폭스바겐의 각형은 금속케이스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대량 생산과 차량 최적화에 유리한 공통점이 있다.
이들 각형은 또 공간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새로운 개념의 셀투팩, 셀투카 기술 적용이 가능하다. 이 기술은 모듈 혹은 팩 공정을 없앤 개념으로 파우치 방식의 배터리로는 구현할 수 없는 기술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업계는 폭스바겐이 등을 돌렸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우리 배터리 업체가 시장 및 기술 트렌드를 이끌지 못한 결과”라며 “중국 업체는 완성차를 대상으로 새로운 기술과 개념을 제안한 반면에 한국 업체는 강력한 신기술을 내놓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한국 배터리 이대로 안 된다
지금까지 국내 배터리 업체가 세계 시장을 주도했던 건 배터리 셀 완성 기술보다, 남들보다 앞서 해외 곳곳에 대규모 생산라인을 확충한 전략이 더 주효했다. 이미 수년전부터 자국을 비롯해 미국·유럽·중국에 생산 라인을 단번에 갖춘 건 우리나라 기업이 유일하다. 산요 등 일본 업체가 처음 개발한 리튬이온 배터리 기술을 빠르게 따라잡아 실제 상품화시켜 주로 일본 업체였던 경쟁사들을 단번에 추월한 전략이 통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배터리 경쟁사에 비해 앞세울 전략적 무기가 별로 없다. 더욱이 완성차 업체들이 배터리 내재화 전략을 확대하고 있어 차별화된 자체 기술 확보나 완성차 업체와의 합작, 군소 완성차 업체 공략 등이 전부인 상황이다.
폭스바겐에 앞서 테슬라는 배터리 내재화를 선언했고, 토요타도 전고체 전지 등 자체 기술을 앞세운 내재화를, 현대차그룹도 장기적으로 내재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에 국산 배터리 업계의 대응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각형과 파우치, 원통형 모두를 수용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파우치는 초기 모바일용 소형 전지가 주류일 때는 각형 금속 캔 케이스와 코어 셀이 같은 구조 형태였지만, 전기차 시장 확대로 중대형 배터리로 발전하면서 코어 셀 구조 등이 크게 달라져 기술 확보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 물론 국내에는 각형 공정 장비와 금속 각형 케이스 등이 이미 개발돼 있어 이를 활용한다면 공정 등의 개발 기간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다.
박철완 서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내년 이후 정부 연구개발(R&D) 추진계획에 차세대 중대형 각형이나 4680과 같은 원통형 전지 등 기술 개발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며 “각형의 경우 공정 장비와 금속 각형 케이스 등을 삼성SDI가 협력사를 통해 하고 있어 이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다.
박태준기자 gaiu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