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캐피털(VC) 업계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민간 자본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민간 주도 모태펀드를 만들고 해외자금이 더욱 많이 유입돼야 합니다. 민간 중심 벤처투자 생태계가 확고히 자리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성배 벤처캐피탈협회장은 VC 시장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 주도로 벤처투자 생태계가 대전환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쿠팡, 배달의민족처럼 해외에서도 주목할 수 있는 스타기업을 계속 발굴해 해외자본도 국내 VC와 벤처생태계에 유입될 수 있도록 투자 생태계를 선진화해야 할 중요한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코스닥이 혁신 시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독립성을 확보하고 세컨더리 시장 활성화도 회수 시장 개선을 위한 시급한 과제로 꼽았다.
코로나19 확산에도 신규 벤처투자와 펀드 결성은 역대 최고치를 매년 경신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도 벤처투자를 통한 신산업 발굴에 대한 기대가 크다. 지 회장은 “벤처캐피털 산업이 한국 경제를 이끄는 굳건한 산업으로 자리잡도록 하겠다”면서 “한국에서 태어난 스타트업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사례를 계속 발굴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대담=김승규 벤처유통부장
-벤처캐피탈협회장으로 취임하게 된 계기와 소감은.
▲벤처캐피탈협회장은 결국 벤처투자 업계를 위해서 봉사하는 자리다. 모든 VC 대표들이 돌아가면서 한 번씩은 해야 하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돌아올 자리이니 만큼 매도 먼저 맞는다는 마음으로 하게 됐다. 임기가 2년이다. 앞으로 2년간 VC협회와 벤처캐피털 산업이 진정한 금융산업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벤처투자촉진법이 지난해 제정됐다.
▲이전까지 창업지원법과 벤처기업특별법으로 나눠 VC를 규율하던 법률이 하나로 묶인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법이 나왔다기보다는 통합법이 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법이 시행됐다. 하지만 업계가 요구하는 모든 사안이 법에 담기진 않았다. 이제 그런 부분에 대한 제도 개선을 건의하는 것이 협회의 과제다.
제대로 법에 담기지 못한 것들이 지금 정부가 도입하려는 선진투자기법이다. 투자기법 가운데 조건부 지분인수계약(SAFE)은 이미 벤처투자법에 반영됐다. 아직 조건부 지분전환계약(컨버터블노트)과 벤처대출은 반영되지 않았다. 새로운 투자기법 도입을 적극 건의했다. 중소벤처기업부에서도 여러가지로 의견을 듣고 있다. 조만간 도입을 기대하고 있다.
조건부 지분전환계약과 SAFE는 유사한 측면이 많이 있다. 자본으로 볼 것이냐 부채로 볼 것이냐가 가장 큰 차이다. 아주 초기 단계 기업에 투자할 때 기업가치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애매한 상황이 온다. 조건부 지분전환계약과 SAFE 모두 일단 지원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나중에 기업이 성장해서 후속 투자를 받을 때 후속 투자 시점의 기업가치에 기초해 처음 투자 가치도 정해지는 시스템이다. 이러면 투자자나 기업 모두 자금 수혈이 쉬워진다.
벤처대출도 마찬가지로 투자자와 기업도 유인책을 줄 수 있는 투자 방법이다. 상법 개정으로 제도 도입을 추진하면 국회에서 공전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벤처투자촉진법 개정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다. 투자기법이 다양해질수록 VC도 기업 상태나 현황에 따라 투자를 달리할 수 있어 상당히 환영할 만한 제도가 될 것이다.
-취임 일성으로 민간 중심 벤처투자 전환을 언급했다.
▲시장친화적으로 민간자본이 투자 시장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많지만, 아직 부족하다. 우리나라 VC 정책은 여전히 관이 주도한다. 모태펀드나 성장금융 같은 정책자금을 통한 지원이 VC 시장에 마중물 역할을 해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VC업계가 성장하려면 민간자본이 더 많이 필요하다. 정부 자금이 들어오는 데 민간 자금을 매칭하지 못해 펀드 결성이 어려운 사례가 많다. 협회가 더욱 노력해야 할 부분이 바로 민간자본 유치다.
그래서 협회에서 정부가 주도하는 모태펀드처럼 민간 주도로 모태펀드를 만들어 보려고 하고 있다. 핵심 연구과제이자 추진과제다. 현재 외부기관에 연구용역을 줬다. 민간 자금이 모태펀드처럼 모일 수 있도록 유인책을 주는 방안이 핵심이다.
통신사업자연합회가 만든 KIF가 최초의 민간 모태펀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도체협회가 자금 지원하는 방식도 그렇다. 포스코에서도 민간 주도로 펀드자금을 출자한다. 다양한 기업에서 보유한 유동자금이 엄청나게 많다. 이 유동자금을 벤처 생태계로 끌어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이 민간 모태펀드라고 생각한다. 민간 모태펀드에 출자하는 기업도 여유자금을 수익성 있게 운용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서로에게 윈윈이다.
-전통 금융권도 최근 벤처투자 시장에 뛰어든다.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VC가 자신의 투자 실적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벤처투자가 흔히 생각하는 만큼 투자 위험이 크지 않은 투자라는 것을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전체 펀드 관점에서 바라보면 결국 벤처투자 역시 수익이 크게 나는 금융상품이라는 걸 각인시켜 주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런 실적이 있어야지만 민간에서도 VC에 투자를 늘릴 수 있다.
다만 가장 아쉬운 부분은 보험사가 최근 투자를 줄이고 있다. 보험사와 같은 민간 출자자가 VC와 가장 투자 성향이 맞는다. 장기자금 운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오는 2023년부터 보험사에 새로운 국제회계기준 IFRS17이 도입되면서 지급여력(RBC) 비율을 높여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이 때문에 위험투자로 구분되는 벤처투자에 출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보험사에서는 출자보다 자기자본 확충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다. VC뿐만 아니라 사모펀드(PEF)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다. 국제회계기준 도입이 세계적인 시류이니 역행할 수는 없지만, 제도적으로 막힌 곳을 뚫어줄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 부분도 연구용역을 실시해 볼 계획이다.
-벤처 생태계에 투자는 늘었지만 회수시장은 10년 전과 큰 변화가 없다.
▲지금 회수시장이 완전히 막혀있다. 마치 동맥경화 같은 상황이다. 벤처투자 시장에 투입되는 돈은 많이 늘었다. 4조3000억원 투자가 이뤄지는 활황인데, 회수시장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주된 원인은 기업공개(IPO) 병목 현상이다. 사실 회수 시장은 국내에서 IPO 말고는 대안이 없다. IPO 병목 현상을 풀지 못하니, 10년 전부터 세컨더리펀드(구주매출)를 결성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장도 아직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세컨더리 시장이 더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IPO 병목현상 해소를 위한 숙원 과제는 결국 코스닥 시장의 분리다. 지금 코스닥 시장이 유가증권 시장과 통합돼 있다보니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특징이 없다. 혁신시장으로 변하질 못한다. 과거에는 코스닥이 유가증권 시장과 분리되어 있어 혁신시장으로 역할을 했다.
나스닥과 뉴욕거래소의 거래 주체가 다른 것처럼 코스닥을 신시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테슬라 규정, 기술특례상장 등 많은 새로운 제도가 생겼지만 사실 큰 효력이 없다. 결국 독립적인 의사결정 체계를 갖춰야만 IPO 시장이 훨씬 좋아질 수 있다.
-인수합병(M&A) 시장은 여전히 활성화되지 않고 있는데.
▲M&A는 20년 전부터 계속 이야기하는 문제지만 쉽지 않다. 한국의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M&A라면 결국 두 집단이 물리적·유기적으로 통합돼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미국이 M&A가 잘된다. 미국은 정말 다양성이 존재한다. 인종과 포용성이나 이런 부분이 문화적으로 모두 녹아 있는데 우리 시장은 아직은 다양성이 부족한 측면이 있다. 이런 부분이 걸림돌이 아닌가 싶다. 결국 M&A 시장 활성화는 우리 문화의 개방성을 더 확보해야 제대로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 당장은 결국 세컨더리 시장 활성화와 코스닥 분리가 좀 더 현실적이라고 본다.
-최근 주목받는 배달의민족, 쿠팡에 대한 평가는.
▲배달의민족은 국내에서는 자금을 회수했지만 결국 다시 딜리버리히어로 지분을 샀으니, 지분이 교환된 셈이다. 쿠팡 사례 역시 VC이나 벤처업계에서는 무조건 좋은 소식이고 모두 환영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스타트업으로 시작해서 세계적 기업이 되는 사례를 계속 보여줘야 한다.
결국 스타플레이어를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스타기업과 유니콘이 계속 나와야만 해외에서도 국내 VC나 국내 기업에 관심을 보인다. 해외자본도 결국 민간 자본이다. 해외자본을 끌어오려면 국내에서도 스타기업이 계속 나와야 한다. 쿠팡과 배달의민족은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 그런 기업이 더 많이 나와야만 한다.
-IMM인베스트먼트는 업계에서 최근 두드러진 성과로 주목받는 회사다. 회사 경쟁력과 투자 전략은.
▲IMM인베스트먼트는 말 그대로 벤처캐피털이다. IMM인베스트먼트가 규모 있는 투자를 하다보니 PE(사모투자)에 가깝지 않느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저희가 운영하는 PE는 일반 PE와는 성격이 다르다.
IMM인베스트먼트에서는 스타트업부터 유니콘까지 키운다. 예컨대 크래프톤 같은 기업은 저희가 회사 설립할 때부터 투자해서 최종적으로는 저희가 운용하는 PEF에서 2000억원을 투자해 정점을 찍은 사례다. 투자 생태계에서 VC가 2000억원을 한 번에 투자하기 어렵다. 하지만 IMM인베스트먼트는 대규모 투자가 가능하다.
위메프도 마찬가지다. 벤처기업에서 시작해 1200억원을 마지막에 투자했다. 하나의 VC에서 이런 대규모 투자를 하는 일이 쉽지 않다. 하지만 IMM인베스트먼트는 하나의 회사에서 벤처기업부터 대규모 투자를 함께한다. 창업기업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시리즈로 투자할 수 있는 펀드가 모두 구성되어 있다. PEF는 결국 대규모로 벤처투자를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회장이 주목하는 미래 유망 분야를 꼽는다면.
▲K-바이오 분야는 당분간 강세를 이어갈 것으로 본다. 제가 1980년대 중반에 대학을 다녔다. 당시 이과생 탑클래스는 전부 물리학과나 전자공학, 컴퓨터공학과를 갔다. 당시에는 의대에 진학하지 않았다. 주로 기초과학으로 우수 인재 몰렸다. 결국 그 결과 우리나라에 정보통신기술(ICT) 분야를 부흥시켰다고 본다.
10년이 넘게 지난 이후에는 역전됐다. 우수 인재가 의대로 많이 몰렸다. 훌륭한 의사들이 진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연구나 창업도 하고 교수 창업까지 한다. 결국 이런 우수 인재들이 우리나라 바이오산업의 중흥을 이끌 것으로 기대한다.
제가 1997년에 VC 시장에 입문했다. 24년이 지났는데, 그때와 상황이 상당히 다르다. 연구 분야나 해외저널에 실리는 논문이 크게 늘었다. 특허도 많아졌다. 바이오산업에 허리가 아주 탄탄해지고 있다. 10년 이내에 '빅 샷'이 터질 기업이 많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협회의 주요 과제와 핵심 사업을 소개해 달라.
▲시장친화적으로 회원 서비스를 계속 확대해 나가겠다. 여러 회원사를 가입시켜 재정도 충실하게 만들고 협회 사무국에도 우수한 인력을 채우려고 한다. 협회에 좋은 인재가 많을수록 산업도 더 발전할 수 있다.
그리고 중기부에 등록된 창업투자회사, 금융위원회에 등록된 신기술금융회사, 유한회사형(LLC)까지 너무 VC업계가 분산되어 있다. 정부가 벤처정책을 이끌기 위해서는 통합시켜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다. 너무 분산되어 있으니 안타까움이 크다. VC 관련 법률을 좀 더 과감하게 통합해 중기부와 금융위를 나누지 않고 통합 지원할 수 있는 법이 생기길 바란다.
-경영철학이나 투자원칙이 있다면.
▲벤처투자는 결국 사람에 충실해야 한다. 스타트업에 투자할 때 직원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창업자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다. 기업은 정말 창업자가 전부다.
물론 창업자가 기업을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창업부터 안정화 단계, 중흥기까지는 창업자 1인 역량이 정말 중요하다. 투자 이전에 창업자랑 밥도 먹고 술도 먹고 운동도 하면서 보이지 않는 능력을 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즉 통찰하는 능력이다. 물론 계량화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많이 접하면 어떤 사람이 회사를 잘 이끌 것인지가 보인다고 믿는다.
처음 만든 창업 모델이 처음부터 끝까지 잘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기업가정신이 있는 창업자는 시대 흐름에 따라 회사를 바꾼다. A에서 시작한 회사가 Z가 되기도 한다. 그런 것이 능력이다. 쉽게 좌절하고 한 번 실패할 때마다 당황하고 그래서는 쉽지 않다. 결국 사람에 충실해야 한다.
○…지성배 벤처캐피탈협회장은
1997년 CKD창업투자 심사역을 시작으로 벤처투자 업계에 뛰어들었다. 1999년 IMM인베스트먼트를 설립했다. 2000년부터 IMM인베스트먼트의 대표로 재직하며 크래프톤, 위메프 등 성장 가능성이 큰 기업을 여럿 발굴하고 벤처기업의 성장과 함께 했다.
IMM인베스트먼트는 설립 20여년 만에 급격하게 성장하며 지난해 업계 최초로 공시대상기업집단에 지정되기도 했다. 초기기업부터 중소·중견기업에 두루 투자하며 벤처 생태계의 양적·질적 발전을 이끈 대표 인물로 손꼽힌다.
지난달 벤처캐피탈협회 14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앞으로 2년간 민간투자 생태계 확립이라는 과제를 위해 기여하는 것이 목표다.
정리=유근일기자 ryuryu@etnews.com
사진=김민수기자 ms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