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성능과 합리적 가격으로 세계 시장을 주도했던 우리나라 가전이 또 한 번 혁신을 불러오고 있다. 그동안 부가적 요소로 인식되던 디자인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인테리어로서 가전'의 가치를 만들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이 주도하는 '취향 맞춤형 디자인 가전'은 국내 중견·중소업체까지 확산돼 'K-가전'의 새로운 경쟁력으로 부상한다.
◇코로나가 키운 가전시장, 예뻐야 잘 팔린다
과거 성능이 우선시되던 가전 시장에서 이제는 예뻐야 잘 팔리는 시대로 변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초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가전 수요가 폭발하면서 이 같은 경향을 더 두드러진다. 실제 삼성전자 '비스포크', LG전자 '오브제컬렉션' 등 소비자 취향에 맞게 패널 소재나 색상 등을 선택하게끔 출시한 취향 맞춤형 디자인 가전은 지난해 대거 출시되면서 새바람을 몰고 왔다.
가전 업계 '취향 맞춤형 전략'은 가치관과 환경 변화에 기인한다. 가전 기능이 상향평준화되면서 차별화 요소로 디자인을 꼽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특히 주 소비층으로 부상한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를 중심으로 가전을 라이프 스타일이나 취향에 따라 선택적으로 수집하듯 구매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가전 업계 움직임은 더 빨라졌다.
지난해 전 세계를 뒤흔든 코로나19는 취향 맞춤형 가전이 안착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온라인 교육, 재택근무 등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늘면서 주거공간에 대한 개념이 바뀐 게 배경이다. 퇴근 후 다음날 출근 전까지 잠깐 머무는 공간에서 업무와 여가까지 동시에 이뤄지는 역할 확대로 투자가 늘었던 것이다. 개인 취향 반영과 생산성 향상이라는 목적 아래 다양한 가전을 구매하면서 디자인 통일성을 갖춘 비스포크, 오브제컬렉션 제품 판매가 크게 늘었다.
특히 지난해부터 이어진 코로나19 영향으로 결혼식을 연기하거나 간소화하고 혼수에 투자하는 신혼부부가 늘면서 트렌드가 빠르게 변했다. 실제 전자랜드에 따르면 지난해 TV, 냉장고, 식기세척기 등 주요 가전의 프리미엄 제품 판매량은 전년 대비 40~60%가량 늘었다. 신혼부부의 '가전 플렉스'가 늘면서 이들의 취향이 반영된 맞춤형 디자인 제품 판매가 급증했다.
◇삼성전자 '비스포크', 라이프 스타일을 가전에 녹이다
삼성전자 대표 가전 라인업인 비스포크는 2019년 냉장고를 시작해 지난해 식기세척기, 인덕션, 공기청정기 등 9개 품목으로 늘었다. 올해는 정수기, 세탁기, 건조기, 에어드레서, 에어컨 등으로 확대돼 총 17종 라인업을 갖췄다. 연내 2종 더 확대될 경우 사실상 삼성전자 생활가전 대부분 제품이 비스포크 시리즈가 된다. 기존 주방가전에 국한했던 것을 생활 가전 전체로 확대하면서 '비스포크 홈' 라인업을 완성했다.
삼성전자 비스포크 경쟁력은 국내 최다 수준 제품 타입과 패널 교체 옵션이다. 냉장고는 22종의 기본 패널에 360개 프리즘 컬러를 제공한다. 소비자가 원하는 색상을 다양하게 조합해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 여기에 1도어에서 4도어까지 원하는 제품 타입도 선택할 수 있어 색상에 디자인, 형태까지 사용자 취향과 라이프 스타일 반영이 가능하다.
삼성전자는 비스포크 생태계 조성에도 나섰다. 다양한 요구사항을 민첩하게 반영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기업과 협업이 필수라고 판단했다. 지난 3월 발족한 '팀 비스포크'는 디자인 파트너, 부품·제조 파트너, 콘텐츠 서비스 파트너로 구성돼 영역별 시장 요구를 파악해 제품화한다.
3년차에 접어든 삼성전자 비스포크 전략은 생활가전 핵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지난해 말 기준 비스포크 가전은 출하량 100만대를 돌파해 확고히 자리 잡았다. 비스포크의 성장은 생활가전 전반 실적 향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올해 1분기 실적에서도 소비자가전(CE) 부문은 매출 12조9900억원, 영업이익 1조1200억원을 기록하며 1분기 기준 최대 실적을 거뒀다. 올해는 북미 시장 진출 등 전 세계 확산을 본격화하면서 전체 생활가전 매출의 80%까지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LG전자 '오브제컬렉션', 공간 가전 트렌드 선도
LG전자는 2018년 가구와 가전을 결합한 'LG 오브제' 제품을 최초 출시한 이후 2020년 이들을 하나씩 모아서 공간 인테리어 가전을 완성하는 'LG 오브제컬렉션'을 브랜드화했다.
지난해 10월 워시타워, 스타일러, 식기세척기, 광파오븐, 냉장고 등 11종을 출시한 이후 올해 휘센 타워 에어컨, 청소기, 공기청정기 등 3종을 추가했다.
LG 오브제컬렉션의 콘셉트는 집안 인테리어와 조화다. 미국 팬톤컬러연구소와 협업해 인테리어에 맞춰 선택하게끔 10여개 색상을 선정했고, 프리미엄 가구에 쓰이는 소재인 페닉스 등 재질도 다양화했다. 냉장고의 경우 고객은 페닉스, 스테인리스, 글라스 등 다양한 재질과 조합된 13가지 색상 중 하나를 냉장고 도어에 적용할 수 있다.
색상 선택 폭은 삼성 비스포크보다 적지만 MZ세대뿐 아니라 X세대, 베이비부머 등 여러 세대가 공감하고 만족할 만한 색상과 형태를 출시했다. 개별 가전이 아니라 이들이 모여 하나의 공간 가전으로서 가치를 더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오브제컬렉션 판매를 본격화한 지 1년이 채 안 됐지만 국내 시장에서 반응은 뜨겁다. LG전자 가전 구매 고객 절반 이상은 오브제컬렉션을 선택할 정도로 대세다. 이를 반영하듯 올해 1분기 생활가전을 담당하는 H&A사업본부는 매출 6조7081억원, 영업이익 9199억원으로 역대 분기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프리미엄 가전 오브제컬렉션 판매가 급증하면서 매출과 수익 모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같은 듯 다른 삼성-LG '디자인 대전'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취향 맞춤형 디자인 가전 전략은 소비자 요구를 충족하는 품목 다변화지만 궁극적으로 종속효과를 노린다. 비스포크, 오브제컬렉션은 색상에서 다양성을 부여하지만 제품 구성과 디자인 등은 전반적으로 제조사별 통일성을 가진다. 타사 가전이 침투하지 못할 장벽을 '취향 맞춤형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세우는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혼수, 이사 등 가전을 대규모로 구매하는 시즌이 있는 데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가전 깔맞춤'이라는 특수한 문화적 속성도 내포한다”면서 “트렌드에 민감한 한국에서 우선 출시해 반응을 살핀 뒤 점진적으로 해외 시장에도 출시해 디자인을 이용한 록인(종속) 효과를 노릴 것”이라고 말했다.
양사 모두 목적은 같지만 전략은 다소 차이 난다. 삼성전자는 원색을 바탕으로 톡톡 튀는 '개성'을 표현하는 도구로 내세운다. 주 고객층 역시 MZ세대처럼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다.
반면에 LG전자는 모든 세대와 집 안 가전을 아우르는 '조화'를 강조한다. 전 세대가 공감하고 튀지 않는 색감을 엄선해 출시한다.
생산, 판매도 차별된다. 삼성전자는 비스포크 라인업을 기존 일반 가전과 비교해 가격 차이를 최소화했다. 비스포크 냉장고의 경우 일반 냉장고 대비 10만원가량 더 비싸며 다른 가전 역시 동일한 수준에 판매한다. 생산 역시 팀 비스포크 전략으로 다양한 협력사와 협업해 제품을 완성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비스포크 가전은 대중적으로 판매하면서 프리미엄 가치를 주자는 철학이 담겼다”면서 “수요예측 시스템과 첨단 색상 조립 방식 등으로 가격을 크게 올리지 않고도 고객 수요를 충족할 수 있다”고 말했다.
LG전자 오브제컬렉션은 프리미엄 라인업이다. 초프리미엄 'LG 시그니처'에 버금가는 프리미엄 라인업으로 포지셔닝해 고품격 가전으로 내세운다. 또 모든 제품을 LG전자가 직접 개발하고 창원에서 전량 생산한다. LG전자가 직접 개발·생산해 품질 보증이 가능하다는 점을 내세운다.
LG전자 관계자는 “LG 오브제컬렉션은 특정 공간이 아니라 집안 전체 인테리어 톤과 조화를 이루도록 돕는 게 핵심”이라면서 “프리미엄 제품군이지만 고객이 공간 인테리어 가전의 차별화된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용철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