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관리의 기본 개념과 원칙을 다루는 국제표준화기구(ISO) 표준에 따르면 기록은 업무 활동과 처리 행위에 관한 '증거' '자산'으로 정의된다. 증거와 자산으로서의 기록 가치는 기록이 생산된 당시 그대로 존재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를 위해서는 기록의 생산, 신뢰성, 관리 등 과정에서 무결성과 진본성을 갖춰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도록 기록을 생산부터 처분까지 능률적이고 체계적으로 통제하는 관리 영역을 기록관리라 한다.
최근 기록관리 기술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 블록체인이다. 블록체인은 본래 비트코인과 같은 가치 전달을 목적으로 개발됐다. 가치 훼손과 변경을 막기 위해 블록체인 내부에 저장된 데이터는 불역적이며 불변적으로 유지되도록 설계된다. 기록관리 관점에서 보면 기록이 생산된 그대로 유지됐다는 진본성 입증, 위변조나 손실이 없었음을 나타내는 무결성 입증, 이외 기록의 감사증적·이력추적·사본관리 등에 블록체인을 활용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기록관리 전문가들은 블록체인을 근본적으로 기록관리 기술로 보고 있으며, 기록관리를 위한 새로운 신뢰 모델로 활용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와 별개로 블록체인의 장점을 기록관리에 적용, 실제 사업화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블록체인 기반 토지대장관리, 의료기록, 국가기록, 금융기록, 물류기록, 문서공증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례는 설계 단계부터 블록체인 전문가에 의해 블록체인 기술 관점에서만 추진되고 기록 전문가 참여나 기록관리 관점은 고려되지 않았다. 블록체인 기반 기록관리 적용 사업에서 정작 기록관리가 배제된 상황인 셈이다.
기록관리 배제는 블록체인 내 기록의 생산·획득·관리 등 과정에서 기록이 증거와 자산 가치를 띠기 위해 적용돼야 하는 기록관리 원칙의 부재를 초래했다. 시스템적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록을 공신력 있게 관리하기 위해 갖춰야 할 기록시스템의 특성과 기록 요구사항도 마련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기록관리 원칙이 적용되지 않은 몇몇 블록체인 기반 기록관리 사업은 수년간 난항에 부닥치다가 결국 사업 실패라는 결과를 낳았다.
기록관리 전문가들은 블록체인 기술을 기록관리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록관리에 블록체인 기술 특성을 어떻게 적용할지, 블록체인 기술에 기록관리 원칙을 어떻게 적용할지, 적용 시 어떤 잠재적인 장단점·이슈가 있는지에 대한 표준화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블록체인 기록관리 국제표준화 프로젝트인 ISO/TR 24332는 이런 배경과 맥락에서 ISO/TC 46/SC 11 문서·기록관리 위원회에 한국 주도로 제안됐으며, 한국이 프로젝트 리더를 맡고 있다. 현재 ISO/TC 46/SC 11 문서·기록관리 위원회와 ISO/TC 307 블록체인 및 분산원장 기술 위원회 간 합동워킹그룹을 설립해 작업 초안이 개발되고 있다. 이는 블록체인과 기록관리의 상호적용을 다루는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국제표준화이다. 이 표준화는 향후 기록관리와 블록체인을 결합한 설계 또는 더욱 신뢰할 수 있는 블록체인 시스템 설계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산업계에서 활용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4차 산업혁명은 산업 간 초융합·초연결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 융합과 연결을 이루는 것은 블록체인과 같은 디지털 기술이다. 디지털 기술의 특징은 '선승독식'(先勝獨食)이다. 선승은 누가 먼저 표준화를 선점하느냐다. 아직 기술 개발이 성숙하지 않은 시점, 기술 개념이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은 시점부터 선행 표준화를 통해 개념을 선점하고 확립해 나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국가 표준화 정책인 만큼 많은 기업이 관심을 기울여서 참여하기를 희망한다. 이것이 디지털 기술에서 선승하는 길이며, 4차 산업혁명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움켜쥘 수 있는 길이다.
김성규 한국전자문서산업협회장 gform@eposto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