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립(而立). 뜻을 세운다는 의미다. 공자는 사람 나이가 서른이 되면 학문의 기초를 단단히 세우고, 마음을 다잡아 하나의 인격체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사회에서도 서른 살이면 어엿한 청년이자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기대받기 마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 의미와 역할에 대한 부단한 성찰 및 고민이 필요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대통령직속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가 출범한 지 30년이 됐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산물로 탄생한 9차 헌법 개정을 통해 설립의 근거를 마련한 지 4년여 만의 과학기술 분야의 상설 대통령 자문기구로 탄생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대규모 투자를 통해 국가적으로 역점을 둔 과기 분야는 과기자문회의 출범부터 본격적인 성장기에 접어들게 된다.
3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돌아보면 성과는 혁혁하다. 대한민국은 수십 년 앞서 있던 선진국을 한 발 한 발 따라잡아 이제는 세계적 수준의 과기 역량을 갖춘 나라가 됐다. 국가 연구개발(R&D) 투자 규모는 100조원에 육박했고, 반도체 등 기술 패권 경쟁에서도 절대 뒤지지 않았다.
코로나 팬데믹 위기에도 모범적인 방역 국가로 자리매김했으며, 본격적인 우주시대 개막을 준비하는 누리호 발사도 성공적이다. 세계지식재산기구(WIPO)의 글로벌 혁신지수 5위,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 과학인프라 3위, 국가과기혁신역량평가(COSTII) 8위 등의 지표가 이를 입증한다. 이 같은 성과에 과기의 미래 비전을 제시해 온 과기자문회의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자화자찬은 여기까지다. 서른 살 과기자문회의는 이제 글로벌 스탠더드와 국민의 눈높이에서 스스로 되돌아볼 때가 됐다. 기후변화, 감염병 등 인류의 미래와 밀접한 문제 개선에 과학과 기술이 얼마나 기여했는가. 국민의 세금으로 투자되는 과기 R&D는 어떤 성과를 창출했으며 국민의 삶에 어떤 편익을 제공했는가. 이 과정에서 과기자문회의의 역할에는 문제가 없었는가.
과기자문회의는 지난 30년 동안 161건의 과기 어젠다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경제 발전을 뒷받침할 신기술·신사업 이슈는 물론 국제협력, 이동통신 상용화, 과기 중심사회론을 비롯해 최근에는 인력양성 및 탄소중립 등 다양하고 광범위한 의제를 다뤄 왔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과기자문회의가 자율성과 독립성에 기반한 수준 높은 의제는 줄고 눈앞에 닥친 현안 대응에 급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한 설문조사 결과 과기자문회의가 정부 부처 입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과기계의 의견은 자문회의에 참여한 전문가의 한 사람으로서 뼈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정부와 민간의 R&D를 총괄하고 혁신을 이끌어 갈 통합적 정책 플랫폼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 강화가 자문회의에 필요하다.
국민과의 소통 과정도 돌아봐야 한다. 과기 정책의 최상위 컨트롤타워의 위상을 가졌음에도 연구 현장과 국민 대중의 관심 및 기대가 크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납세자인 국민의 혈세가 과기 연구 현장에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믿음과 확신을 심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국민의 삶의 질에 직결되는 어젠다는 선제적으로 발굴해 논의의 장으로 끌어내는 역할을 과기자문회의가 해야 한다. 최근 국민참여자문단을 운영하며 국민과의 직접 소통에 나서기도 했지만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다.
공자는 나이 예순을 이순(耳順)이라고 했다. 생각이 원숙해져서 무슨 말을 들어도 거슬림이 없이 바로 이해가 되는 경지라고 한다. 균형 잡힌 시각 및 전문성을 바탕으로 사회 각계의 다양한 목소리와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산적한 글로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자문회의가 지향해야 할 목표로 이보다 적합한 것이 있을까. 과기자문회의 출범 30년을 축하하며 다음 30년에 더 큰 기대를 걸어 본다.
손병호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혁신전략연구소장(전 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 bhson@kistep.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