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한 벤처의 대기업 납품 실패기

얼마 전 만난 벤처기업 사장의 대기업 납품 실패기가 관심을 끌었다. 기술력이 뛰어났지만 자금이 없던 이 회사는 A사의 투자를 받았고, 여러 해 만에 특허 장비를 개발했다. 산업 수준을 끌어올릴 잠재력이 있는 장비였다. 대기업이 관심을 보였고, 그 가운데 한 곳의 모든 기술 테스트를 통과했다. 최종 결정만 남은 상황이었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거절 사유가 놀라웠다.

“A사가 경쟁사의 협력사여서 곤란하다.”

기술력이 문제라면 이해를 하겠다. 그런데 아니었다. '경쟁사 세력'으로 분류된 게 결정적 원인이었다. 사장은 '가슴을 쥐어뜯는' 고통을 호소했다.

경쟁사의 직접 투자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경쟁사에 납품하는 수많은 협력사 가운데 한 곳으로부터 투자를 받은 게 문제가 될 줄이야. 오랜 해외 생활 끝에 귀국한 사장이 국내 물정에 어두운 게 죄라면 죄일까.

대기업이 정점을 차지하고 그 아래 수많은 협력사를 거느리는 '수직 밸류체인'은 한국 산업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디스플레이를 포함, 한국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는 데 공헌한 점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폐쇄성이 아쉽다. 대기업이 2개라고 가정해 보자. 중소기업은 신기술을 개발해서 이들 2개 대기업에 모두 납품하고 싶다. 그러나 한국에선 어렵다. 다른 편은 끼워 주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셈이다. 그러니 소재·부품·장비(소부장) 협력사는 성장 속도가 더디다. 협력하는 대기업이 개발하라는 기술만 개발한다. 톡톡 튀는 신기술이 잘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수출도 눈치 보며 해야 한다고 하니 이만저만 큰 손실이 아니다.

모든 산업에서 중국의 추격이 무섭다. 기술 수준이 낮은 산업부터 빠르게 시장이 잠식되고 있다. 기술 수준을 높이는 수밖에 없다. 폐쇄적 밸류체인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 참신하고 수준 높은 기술이 활짝 꽃피도록 칸막이를 제거하고, 넓은 무대를 만들어 줘야 한다. '누구 편이냐'를 묻기 전에 '어떤 기술이냐'를 묻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김용주기자 kyj@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