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텍, 국내 최초 연구중심 의대 설립 추진]<중>바이오·의료 선진국 비결은 의학과 공학의 융합

고령화사회 대비하는 미국 연구중심 의대들…'패러다임 체인지'
하버드의대-MIT HST 프로그램…70년대부터 의학-이·공학 분야 연계
세계 첫 공대 기반 의대 설립한 일리노이주립대…혁신·협력·사회기여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의학을 이끌었다. 미국은 경제발전을 기반으로 천문학적 연구개발(R&D) 비용을 투입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외 지역에서 과학·의학 인력을 유입해 의학 중심지로 성장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20세기 초 의과대학과 병원, 대학이 하나로 모여 '과학적 의학(scientific medicine)'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현대 의학교육에 큰 영향을 끼친 '플렉스너 보고서(Flexner Report)'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다.

1900년대 초 의과대학 재정난, 의학교육 변화 요구 등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던 미국 의사협회가 교육자 에이브러햄 플렉스너에게 의뢰해 '미국과 캐나다의 의학교육'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20세기 미국 의료교육과 시스템 개혁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미국은 물론 세계 현대 의학교육의 근간이 됐다.

미국 대학이 100여년이 지난 플렉스너 보고서가 세운 패러다임에 새롭게 도전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하버드 의대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가 협력해 설치한 '하버드-MIT HST(Health Sciences and Technology)' 프로그램이다.

1970년에 설립된 이 프로그램은 의학과 이·공학 분야 연계에 초점을 맞춘 가장 오래된 학제간 교육프로그램이다. 의학교육은 하버드, 이·공학 분야 교육은 MIT가 주관한다. 의사(MD)과정과 의학박사(PhD)과정으로 구분돼 있고, 의공학·의학물리학(MEMP) 등을 운영한다. 이후 전문가들은 이 프로그램이 의학과 이·공학 간 근본적인 융합 교육 체계 구축에 한계가 있다고 평가했지만 융합교육의 새로운 도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세계 최초 공대 기반 의과대학-일리노이주립대 어바나 샴페인캠퍼스(UIUC) '칼 일리노이 의대'

2015년 일리노이주 작은 도시 어바나 샴페인에는 새로운 의대가 문을 열었다. 미국에서도 특히 공학분야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일리노이주립대 어바나 샴페인 공과대학이 어바나시를 거점으로 하는 칼 재단과 손잡고 세계 최초 공학 기반 의대를 설립했다.

일리노이주립대 어바나 샴페인캠퍼스(UIUC) 칼 일리노이 의대 수업장면
일리노이주립대 어바나 샴페인캠퍼스(UIUC) 칼 일리노이 의대 수업장면

의대 설립에 관심을 가진 것은 급속하게 고령화사회로 가고 있는 미국 상황 때문이었다. 기대수명은 늘어나지만 인체는 그에 비해 진화가 더디고 지금의 의학교육은 여전히 20세기 초에 완성된 플렉스너 보고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반성에서다.

이들의 목표는 정체 상태에 이른 의료기술에 도전하는 한편,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과 질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의료비용을 절감하는 새로운 길을 찾는 의학 혁신가(Physician-innovator)를 양성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 대학이 선택한 것은 공학과 의학의 융합이다.

칼 일리노이 의대는 환자 중심, 시스템 기반 의료 제공, 공학·생물학·의학·인문학의 융합, 연구 기반 혁신, 조기 임상 경험 제공 등에 중점을 두고 공학 원리를 교육에 도입했다. 의학 개념을 학습할 수 있도록 하는 기존 의학교육과 전혀 다른 개념의 커리큘럼을 제공한다. 가령 유체역학의 원리를 가르침으로써 신체 심혈관 시스템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일리노이주립대 어바나 샴페인캠퍼스(UIUC)
일리노이주립대 어바나 샴페인캠퍼스(UIUC)

많은 대학이 의대에 공학 수업을 포함시키거나 의과학자 양성 트랙을 마련했고, 하버드-MIT처럼 복수학위제를 운영하지만 의학자와 과학자, 공학자가 함께 공학과 의학을 융합한 커리큘럼을 개발했다. 칼 일리노이 의대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는 600명에 달한다. 하지만 실제로 의대에 소속된 전임교원은 20명에 불과하다. 즉 의대에 소속된 교원뿐만 아니라 자연대학과 공학대학 소속 교원도 이들을 가르치도록 돼 있는 것이다.

칼 일리노이 의대는 신입생 모집 단계부터 수학, 컴퓨터 프로그래밍, 데이터 사이언스 등 배경을 가진 학생들을 목표로 했다. 이 대학 학생 80%가 공학전공자일 정도다.

커리큘럼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의료현장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연구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대표적인 것이 캡스톤 프로젝트다.

일리노이주립대 어바나 샴페인캠퍼스(UIUC)의 칼 일리노이 의대 건물 내부
일리노이주립대 어바나 샴페인캠퍼스(UIUC)의 칼 일리노이 의대 건물 내부

공학교육 프로그램으로 알려진 캡스톤은 문제해결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아이디어를 실제로 시제품으로 기획, 설계, 제작하는 전 과정을 경험하게 하는 교육과정이다.

이 대학 학생들은 캡스톤 프로젝트를 통해 본인 아이디어를 실제로 시제품으로 구현하도록 하며,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은 1만달러까지 학교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다. 프로그램을 통해 창업 가능성이 있는 만성신장질환 진단키트, 코로나19 신속진단 시스템 등 다양한 시제품이 개발됐다.

미국 유력 일간지 시카고트리뷴은 이 대학 설립에 대해 “의학에 있어 혁명을 불러올 새로운 세대의 의사를 양성할 준비가 돼 있다”고 평가했다.

텍사스주에 위치한 텍사스 A&M대학 텍사스 메디컬 센터 전경
텍사스주에 위치한 텍사스 A&M대학 텍사스 메디컬 센터 전경

◇“의사공학자 되라”…텍사스A&M대학의 새 도전

텍사스주에 위치한 텍사스A&M대학은 공학대학을 중심으로 기존 의대, 휴스턴감리교병원과 손잡고 2019년 '이엔메드(EnMed)'라는 새로운 의대를 설립했다.

텍사스A&M대는 미국 국립보건원 내 국립 의생명이미징·생명공학연구소장을 맡았던 로데릭 페티그루 박사를 학장으로 영입했다. 새로운 의대 설립에 대한 강력한 의지였다. 그는 MIT에서 방사선 물리학 박사를 받고 마이애미대에서 의학박사를 받은 대표적인 의과학자다.

이 대학은 4년간 의학박사와 공학대학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됐다. 의학과 공학 분야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이중언어자(Bilingual)'이자 '의사공학자(Physicianeer)' 양성을 목표로 하며 입학자에게 전자, 기계, 재료과학, 컴퓨터과학 분야 학사 학위를 요구한다.

포항=정재훈기자 jho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