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2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반도체회의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실리콘 웨이퍼를 들고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과학기술이 국제질서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음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동시에 국가 차원의 과학기술 역량을 결집해서 새로운 시대에 대응해야 한다는 숙제를 일깨운 사건이다. 이처럼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대통령 선거 관련 기사를 보면 안타깝다. 과학기술·교육 이야기는 거론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5월 21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은 안보 동맹을 기술 동맹으로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두 나라 정상은 공동성명문에서 “기술 환경의 급속한 변화에 따라 우리는 공동의 안보 번영 증진을 위해 핵심 신흥 기술 분야에서 파트너십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며 기술 동맹의 중요성과 방향성을 보여 줬다.
주요국이 첨단 기술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는 이유는 패권 경쟁 범위가 기존 군사·경제 부문에서 기술 분야까지 확장됐기 때문이다. 기술 패권 경쟁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국제질서는 과학기술 역할에 대한 시각을 확장했다. 전통 과학기술 역할은 새로운 지식의 진보를 이끌고 경제 성장에 기여하며 각종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기술 패권 경쟁 시대에서 첨단 기술은 경제문제는 물론 국가 안보에까지 직접 영향을 미치는 전략의 핵심이 되고 있다. 국제질서가 과학기술 중심으로 재편된 것이다.
주요 선진국의 대응 전략을 보면 새로운 국제질서 재편 상황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미국은 과학기술 최고 선도국으로서 첨단 기술 패권 유지를 위해 향후 5년 동안 약 120조원을 10대 핵심기술에 투자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와 함께 국립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에 기술혁신 담당 부서를 신설, 국가 차원에서 첨단 기술 확보를 지원할 계획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7월 글로벌 신기술 고위급회의 연설에서 기술 중심으로 동맹과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미국 주도로 국제질서를 재편하겠다는 의도를 밝히기도 했다. 미국과 직접 기술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은 국가 차원의 총동원 체제를 선언했다. 3월 개최된 양회에서 7대 첨단 과학기술 확보와 8대 신산업 육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국가 전략이 발표됐다. 영국은 총리실 산하에 과학기술 전략 담당 부서를 신설하고 첨단 기술 확보를 위해 국가 역량을 결집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첨단 기술 경쟁의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응하기 위해 과학기술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 국가 전략 차원에서 첨단 기술을 지정·육성·활용하는 체계를 갖추고 핵심 분야에 과감한 투자를 지속해야 한다. 단기간 내 투자 성과를 얻으려 하기보다는 장기 관점에서 첨단 기술 확보 체계를 평가하고 이를 보완·발전시켜 나가는 노력도 필요하다.
정부는 혁신 역량이 우수한 민간과의 협력을 확대하고 산·학·연 현장의 연구자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법률·제도·재정 지원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 연구 능력 강화는 물론 우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고등교육 문제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과학기술이 중요하지 않은 시절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명확하다 할 수 있다. 세계는 지금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첨단 기술이 기업과 국가 승패를 가르는 4차 산업혁명을 경험하고 있다. 인공지능(AI), 바이오,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차세대 이동통신, 양자정보과학 등과 같은 첨단 기술은 국제질서의 새로운 중심으로 등장하고 있다. 첨단 기술 경쟁 시대에 우리나라는 과학기술 역량을 총결집, 미래를 향한 성장과 혁신을 계속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민구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mkh@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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