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산업화 이전인 1961년 무역통계를 보면 수출 5대 품목 가운데 오징어가 들어 있다. 요즘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인 주목을 끌고 있는 가운데 수출 5대 품목 모두가 첨단 과학기술 제품인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산업화를 이룬 것은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이 주효한 탓이 크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 선진국 기술을 모방해서 한 걸음 더 빨리, 더 싸게 만들어 판 전략은 유일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당시 산업화 전략은 경제개발 목표 설정과 이를 달성하기 위한 산업 진흥으로 요약할 수 있다. 헌법 127조 1항에는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돼 경제 발전 수단으로 과학기술을 생각한 헌법 개정 당시 인식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이를 계승한 국가 발전 정책은 경제-산업-과학기술로 이어지는 수직적 구조를 견고히 했다. 빠른 추격자 전략 수행에 안성맞춤이었다.
문제는 우리가 선도국가로 발돋움한 지금도 여전히 과학기술 정책은 수직적 구조 하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에 기반한 창의성으로 이전에 없던 제품과 기술이 만들어지고 이로부터 새로운 산업과 경제 패러다임이 태동하는 지금은 추격자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면서 한국의 추격자 전략은 한계에 부닥쳤다. 지금과 같은 시스템에서 창의적 연구개발(R&D)을 외치는 것은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하다.
바야흐로 기술과 산업, 안보가 연결되는 패권 경쟁 시대가 열렸다. 지난 몇 년간 아슬아슬하던 미-중 패권 경쟁에 코로나 팬데믹이 기름을 부었다. 특히 백신 생산과 배분 과정에서 드러난 백신 민족주의는 국가 전략기술 유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실히 보여 줬다. 기술 패권은 감염병, 기후변화, 인권과 같은 전 지구적 문제까지 포괄하게 됐다.
이에 대응하는 각국의 전략은 치밀하고 치열하다. 선두에 나선 미국의 조 바이든 정부는 대중국 선언과 함께 핵심 첨단기술 분야 R&D에 5년 동안 약 2000억달러를 투자하는 '혁신경제법(USICA)'을 통과시켰다. 여기에 맞불을 놓은 중국은 과학기술 자립자강을 내세워 8대 산업, 7대 전략기술을 집중 육성하겠다고 나섰다. 일본 기시다 후미오 신임 총리도 과학기술 입국에 의한 경제성장 전략을 제시하며 경제 안보와 직결되는 연구에 약 1조300억원 규모의 기금 창설 계획을 밝혔다. 유럽도 탄소국경세(CBAM) 등 다양한 기술무역장벽을 높이고 있다.
한국도 과학기술이 국가 발전을 주도하는 선도형 국가(First mover)로 탈바꿈하는 과학기술 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국가 R&D는 정부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그러나 선도형 R&D는 얘기가 좀 다르다. 일단 목표를 미리 정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모방할 대상도 없다. 그 대신 추상적인 R&D 소명(mission)이 주어질 뿐이다.
예를 들어 인간을 달에 보내는 아폴로계획은 소명 외 정해진 틀이 없었고, 방법을 찾아 나가는 길이 곧 R&D로 이어졌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새로운 산업과 경제가 출현한다. 바로 이것이 과거의 틀을 벗고 과학기술이 경제 정책의 하부 구조로부터 독립해야 할 결정적 이유다. 물론 산업 고도화를 지원하는 것도 과학기술의 중요한 임무다. 이 트랙은 해 온 대로 구체적 목표를 설정·관리하면서 성패 여부를 따지면 된다. 다만 창의성 기반의 R&D는 섬세하게 구분해야 한다. 이런 획일적 방법을 적용하면 당장 산업 현안은 해결할 수 있지만 기술 주권을 확보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패권 경쟁의 새판이 짜이고 있다. 절체절명의 시기에 한국이 선도국으로 올라서려면 지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과학기술 정책의 새 틀이 필요하다.
이우일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장(서울대 명예교수) wilee@kof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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