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유전체 프로젝트는 인류가 시도한 대규모 과학 사업 중 하나로, 약 29억달러 예산을 들여 미국을 중심으로 1990~2003년에 진행된 사업이다. 당시 이 프로젝트와 관련해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가 주도했던 미국 국립 인간 유전체 연구소와 크레이그 벤터 박사가 이끌고 있던 '셀레라 지노믹스'(Celera Genomics)라는 민간 연구소 간 경쟁이 치열했다. 콜린스 박사는 최근까지 오랜 기간 미국 국립보건원장으로 재직해 온 저명한 연구자 및 행정가로, 코로나19에 대응하며 방송에서도 자주 볼 수 있었던 인물이다. 벤터 박사는 현재 '크레이그 벤터 연구소'를 운영하며 합성생물학이라는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당시 이 두 연구 그룹 간 경쟁에 얽힌 부정적인 소문에도 2000년 백악관에서 열린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 민·관 공동발표회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연설은 이 사업의 성공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오늘 우리는 신이 창조한 생명의 언어를 봅니다. 이 언어의 복잡성, 아름다움, 경이로움을 보면서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인간 유전체에는 A, C, G, T라고 불리는 4종류의 염기 서열이 무려 30억개로 이뤄진 DNA 집단이다. 이 가운데 약 5%는 단백질을 만들어 내는 기능성 유전자이고, 유전자 개수는 약 2만개다. 인간 유전체 염기 서열 모두를 작은 글씨로 인쇄해 책으로 만들어서 책꽂이에 꽂으면 웬만한 사무실의 벽 한 면을 다 차지한다.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를 계기로 전문가들은 생명과학과 의학의 발전이 가속화하고 신약 개발과 질환 치료의 혁신이 이뤄질 것으로 크게 전망했다.
지난 20여 년간 유전체 정보가 해당 분야의 학문과 연구 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만으로 모든 생명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다. 유전체에서 유전자를 이루지 않는 95%의 DNA는 쓸모없는 부분(junk DNA)으로 간주했으나 후속 연구를 통해 이들 대부분이(약 80%)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RNA 형태로 '전사'(transcription)되고, 이들이 이전에 알고 있던 사실과는 달리 특정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결과들이 속출하고 있다. 특히 단백질을 만들어 내는 유전자 2만개의 경우 이들의 기능과 역할을 알기 위해서는 단순히 DNA 수준에서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유전자 기능 및 역할을 알아내는 연구 방법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것은 유전자 하나하나를 제거하는 생쥐 모델 연구다. 사람과 생쥐는 유전체 크기가 비슷하고 유전자 유사도는 약 85% 일 정도로 매우 높아서 인간 유전자 연구를 위해 생쥐를 이용하는 것은 생의과학 분야에서 필수적이다. 이러한 연구에서는 특정 유전자가 제거된 생쥐에서 보이는 생명 현상의 변화를 통해 유전자의 역할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정자에 존재하는 단백질을 만들어 내는 특정 유전자를 제거한 생쥐는 정자가 수정할 수 있는 기능을 잃게 되어 난임이 유발된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해당 유전자는 정자의 수정 기능에 필수적임을 발견하게 된다. 정자 외 다른 유형의 세포에서 발현되는 유전자들도 유전자 제거 생쥐 모델 연구를 예외 없이 수행한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들에서 알게 되는 놀라운 사실은 유전자가 제거된 생쥐에서 생명 현상의 주요 변화를 보이는 기능성 유전자들보다 그러한 변화를 나타내지 않는 유전자가 더 많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유전자 제거 생쥐가 아예 출생하지 못하는 연구 결과를 통해 개체의 생사 및 초기 발생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유전자로 판명되는 유전자는 전체 유전자의 약 25%뿐이다. 또한 유전자 제거 생쥐 연구를 수행하기 전에 다양한 체외 분석을 통해 성체 생쥐에서 특정 역할이 있을 것으로 충분히 예측한 이후 이러한 유전자를 대상으로 유전자 제거 생쥐를 제작해서 분석했을 때 예상과 달리 기대했던 생체 변화를 보이지 않는 연구 사례가 더 많다. 예측과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약 20%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특정 역할을 하는 유전자들이 있고 있으나 마나 한 유전자들이 따로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유전자가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없게 되면 연구자 입장에서는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필자도 오랜 연구 기간 이러한 발견을 흔치 않게 경험하면서 풀리지 않는 이 미스터리에 다소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됐다.
첫째 '역할 없는 유전자'는 본래 역할이 없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유전자가 제거됐을 때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다른 유전자들이 그 사라진 기능을 대신해 줄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제거된 유전자와 매우 유사한 유전자가 짝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둘째 '역할 없는 유전자'는 비상 상황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자 단백질을 만들어 내는 특정 유전자는 생체 내에서는 역할하지 않으나 체외수정의 비정상적인 환경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전자 제거 생쥐 연구를 수행하기 전에 주로 시도해 보는 체외 세포 배양 연구에서는 특정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으나 실제 유전자 제거 생쥐에서 이와 다른 연구 결과가 나온다면 세포 배양 실험이 세포에는 일종의 비정상 또는 비상 상황의 여건일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역할 없는 유전자'가 미미하지만 특정 역할을 하고 있음을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다. 유전자 제거 생쥐의 컨소시엄 연구를 통해 이전에 알아내지 못한, 미약하지만 매우 세분된 변화들이 발견되곤 한다.
마지막으로 '역할 없는 유전자'는 생명체의 생사 및 주요 기능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각 개체의 특징에 관여한다.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의 후속 연구를 통해 밝혀진 것으로, 개인마다 약 1%의 유전자는 염기 서열에 치명적인 변이가 있어서 그 기능이 아예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1%의 유전자가 사람마다 종류가 다르다면 각자는 서로 다른 장단점을 가지고 다양성을 지닌 개체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전자들이 모여서 그 역할에 평형을 이루어 한 생명체를 유지하듯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도 그 중요성과 비중은 서로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각자의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이 사회가 영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생명과학자들이 미세하지만 각 유전자의 기능과 역할을 알아내기 위해 탐구하듯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도 각 구성원의 역할을 더욱 찾아보고 인정해 주는 시대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이러한 점에서 유전자 제거 생쥐를 만드는 원리로 2007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은 미국 유타 주립대의 마리오 카페키 교수가 했던 말이 더욱 와닿는다. “여러분이 연구하는 유전자가 제거된 생쥐를 분석하는 실험에서 어떤 변화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유전자가 존재하고 발현하는 곳을 더 분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유전자에는 역할이 있습니다.”
조정희 광주과학기술원 대학장 및 생명과학부 교수 choch@gist.ac.kr
◇조정희 광주과학기술원 대학장은…
서울대 자연대학 동물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미국 코네티컷주립대 의대에서 발생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및 미국 국립보건원에서 연구한 뒤 광주과학기술원 교수로 20년간 재직하며 생식학과 발생학 분야의 유전자 연구로 성과를 내왔다. 현재는 광주과학기술원 학장으로서 리버럴 아츠 성격의 연구 특성화 대학으로의 발전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