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은 우리나라 발전에 큰 역할을 해 왔다. 전전자교환기 개발, 세계 최초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5세대(G) 등 첨단 산업을 선도했다. 주력산업인 반도체, 철강,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 산업 등의 급성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국제적인 평가도 높아 2021년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 과학기술 인프라 순위에서 세계 3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별 과학기술혁신역량 지수도 세계 5위로 평가된 바 있다.
다른 한편에서 그동안 성공해 온 추격자(패스트 팔로어) 전략의 한계로 선도자(퍼스트 무버) 전략으로의 전환이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도 있다. 인류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창의적 개척 연구보다는 평가에 유리한 추격형 연구에 집중해 혁신성과 영향력이 낮다는 보고가 있다. 국민 삶의 질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환경 기술과 바이오 기술이나 우주 기술, 5G·6G 등 미래 핵심 기술 확보에 취약하다는 우려도 있다. 과학기술인 위상 저하로 우수 인재 이탈이 가속화되고 첨단 분야 필수 인력의 확보가 어려워지는 현실적 문제도 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시스템에서는 정부가 중심이 돼 연구개발 기획을 하고 예산을 확보한다. 추진할 연구 주제와 연구팀 선정, 성공·실패 판정에 이르기까지 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하고, 때로는 연구 방법과 내용의 수정에 개입하기도 한다. 과학기술자는 이러한 과정에서 전문적인 지식과 견해를 제공하고 연구개발을 수행해 결과를 창출하는 역할인데 많은 경우 기획 과정에 참여한 연구팀이 과제를 수행하게 된다. 주어진 과제를 일사불란하게 연구하는 추격자 전략에는 효율적이지만 어떤 주제를 연구해야 하는지 자체가 중요하고, 연구 도중에도 필요에 따라 신속하게 전환돼야 하는 선도자 전략에 최선의 시스템은 아니다.
과학기술 역량이 국가 위상을 결정하는 기술패권 시대를 맞아 선도적 과학기술 시스템을 확립하기 위해 과학기술 주체 간 역할을 재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가 연구개발 목적 점을 제시하고 과제의 기획, 선정, 성과 평가 등을 주관하되 이때 참여하는 전문인력들은 과제를 수행하는 연구팀과 분리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선진국 사례에서 보듯 전담 전문인력을 별도로 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구개발 수행은 연구 방향의 전환을 포함해 과학기술자들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전담하고, 성과에 대한 책임을 갖는 것이 적절하다.
또한 연구개발 과제들이 추구하는 성과 목표와 추진 형태를 좀 더 유연하고 다양하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기초지식 구명에서부터 원천기술 개발, 생산기술 개발, 미래 기반 기술 개발, 공공 기술 개발 등 과제별 추진 목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성과에 대한 평가도 쉬울 것이고 과제의 선정 기준도 분명해질 것이다. 기초 연구라면 장기적 자율적인 연구를 추진하며, 산업과 관련된 연구는 기업에 주도적인 권한을 부여하고 발생하는 특허와 매출 중심으로 평가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실패 가능성이 짙은 미래 지향적 선도 연구는 장기적으로 추진하되 연구개발 도중에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변신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적절하다.
과학기술 기획·수행 과정에서 개방성이 확대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주체가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데 따른 어려움이 크겠지만 최근의 비대면 추세와 고도화된 인공지능을 활용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다양한 의견이 모이고 집단지성이 이뤄짐에 따라 최적의 선택이 가능해지며, 최소한 의사 결정 과정과 참여 인력들에 대한 신뢰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새로 시작하는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과학기술을 중시하고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앞으로 최적의 방안들이 제시될 것으로 기대된다. 무엇보다 자기 주도적 특성이 있는 과학기술자들이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고, 인재들의 합류가 이어지도록 하는 정책과 시스템이 제시되기를 희망한다.
이병택 전남대 교수(광주전남지역혁신연구회장) btlee@chonnam.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