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부터 미-중 경제패권 싸움, 지정학적 패권 갈등, 첨단기술 패권 경쟁 등 '패권'(覇權)이라는 용어가 미디어를 통해 자주 노출되고 있다. 더욱 눈여겨봐야 할 점은 이 패권이라는 용어에 붙어 다니는 '싸움' '갈등' '경쟁' 등과 같이 대립을 의미하는 단어들이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지속돼 온 미국 중심의 글로벌 경제·군사·기술 패권 구도에 균열이 생기고, 이로 인해 새롭게 패권에 도전하는 국가가 생겨나고 있다는 의미다.
굳이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이나 '킨들버거 함정'(Kindleberger Trap) 같은 정치적인 해석의 틀을 들이대지 않아도 미국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가 흔들리고 있음은 최근 글로벌 정치·경제 상황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일련의 대립 양상 가운데 자국의 중장기적 명운을 걸고 벌어지고 있는 총성 없는 전쟁이 바로 첨단기술 패권 경쟁이다.
기술 패권 경쟁이 격렬하게 벌어지는 상황은 비단 최근 일만은 아니었다. 근대 이후 경제·정치적 질서가 재편되는 시기마다 주요국들은 항상 타국보다 선진적이거나 효율적인 기술을 우선 확보하고, 그 비밀을 지켜서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을 펼쳐 왔다. 다만 기술 패권 경쟁 당사자와 경쟁 기술 분야가 시기마다 달라져 왔던 것인데 최근 기술 패권 경쟁은 이른바 G2로 불리는 미-중 간 경쟁만이 아니라 유럽의 기술 선진국과 일본, 한국, 호주, 캐나다, 대만 등 다수의 국가가 동시다발적으로 벌이고 있는 경쟁이다 보니 정치·경제적 합종연횡 여부를 떠나 복잡성이 매우 높다는 특징이 있다. 더불어 최근 기술 패권 경쟁의 핵심 대상 분야는 디지털 전환 중심의 첨단 정보통신기술(ICT) 분야뿐만 아니라 에너지·우주·항공 등 광범위한 분야로 확장돼 가는 양상이다. 따라서 단순히 기술 확보 경쟁만이 아니라 표준 선점과 비즈니스 모델 선도 경쟁도 치열하게 전개되는 모습이다.
여기서 문제점은 ICT 강국으로 자리매김한 대한민국도 첨단 ICT 분야에서 기술 경쟁이 격화되는 것에 긴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근 ETRI 기술전략연구센터가 분석한 글로벌 주요국들의 정부 ICT 투자 포트폴리오를 보면 우리나라의 미래 먹거리에 대한 위협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010년 이후 주요국의 ICT 분야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은 프랑스를 제외하고 대부분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다. 미국 연평균 예산 증가율(CAGR)은 최근 10년간 4.8%, 독일의 경우 3.8%. EU 27개국은 2.3%로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상회하는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10년부터 2020년까지 정부 ICT R&D 투자 증가율이 6.2%로 세계 최고 수준의 투자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절대 금액 측면에서는 미국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해 여전히 선택과 집중에 의한 효율적 투자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편 미국은 2020년부터 추진하는 '핵심·유망기술 국가전략'에서 올해 19개 핵심·유망기술에 대한 투자를 강조했는데 그 가운데 무려 11개가 ICT와 관련돼 있다. 이 외에도 '미국 혁신경쟁법'(USICA), ICT R&D 핵심 프로그램인 '네트워킹 정보기술 연구개발(NITRD)' 등을 기반으로 인공지능(AI), 반도체, 고성능컴퓨팅, 양자정보기술, 첨단통신, 사이버보안, 로봇, 첨단 제조, 데이터 등 디지털 전환과 관련된 ICT 분야에 대한 정부 투자를 대폭 강화하는 양상이다.
EU 역시 2021년부터 '허라이즌유럽'(Horizon Europe)과 '2030 디지털 컴퍼스(Digital Compass)' 등 정책을 기반으로 첨단 제조, AI, 사이버보안 및 연결, 고성능 컴퓨팅, 마이크로·나노 전자 및 광자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중국도 '14.5 규획(規劃)' 정책을 기반으로 AI, 빅데이터, 클라우드, 블록체인, 네트워크, 양자정보, 사물인터넷(IoT), 가상현실(VR)·증강현실(AR), 네트워크 보안 등 디지털 전환 관련 ICT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앞에서 열거한 기술명들을 살펴보면 우리 정부가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ICT 분야와 대부분 겹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동일한 첨단 디지털 기술 확보에 국가의 미래가 걸려 있음을 모든 주요국이 강하게 인식하고 있다.
이런 첨단기술 패권 경쟁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규모의 열세를 전략적 효율성으로 상쇄시키는 혜안이 필요하다. 필자는 그 대안의 하나로 '국가 지능화'를 강조해 왔다. 국가 지능화는 디지털 전환의 핵심기술이라 할 수 있는 지능정보 기술을 우리 경제·행정·연구개발·교육 시스템에 내재화시켜서 국가 시스템 자체가 변화에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지능화된 시스템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역동적 혁신을 실현할 수 있는 국가지능화시스템 역량을 가지고 투자 규모가 우리보다 큰 주요국과 경쟁하자는 말이다.
마침 차기 정부에서는 '디지털 플랫폼 정부'를 최우선 국정과제의 하나로 천명하고 있다. 첨단기술 패권 경쟁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국가 지능화 추진이라는 국가적 소명이 잘 발현된 국정과제이기에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ETRI는 현재 '디지털 대한민국 대전환' 전략을 구상하고 있다. 경제·기술 패권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 지능화를 추진하는 장대한 청사진과 실천적 아이디어가 여기저기서 모색돼야 할 절실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이러한 청사진과 아이디어들을 한데 엮어서 대한민국을 역동적인 혁신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해 과감하게 투자하는 차기 정부의 모습을 기대한다. 그래서 개인이 행복하고, 성숙한 공동체가 갈등을 완화하고, 산업은 지속으로 성장하며, 공공 분야도 혁신하는 그런 대한민국을 꿈꿔 본다.
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joonkim@etri.re.kr
<필자소개> 김명준 원장은 자타 공인 우리나라 최고 소프트웨어(SW) 전문가로 꼽힌다. 프랑스 유학 시절에 대한민국 최초로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타이컴(TiCom) 탄생에 일조했다. 우리나라 첫 데이터베이스관리시스템(DBMS)인 바다 시스템, 리눅스 표준플랫폼 부요(Booyo), 글로리(Glory) 사업을 통해 우리 SW산업을 한층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3년 미국 리눅스재단 이사에 선출됐고, 이후 개발기술 상용화를 위한 연구소기업 창업, SW정책연구소장직을 거쳐 ETRI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TRI를 국가지능화종합연구기관으로 천명하고 인공지능(AI) 실행전략, AI 아카데미, 중장기 기술발전지도 2035, 전주기 통합사업관리체계 등을 완성시켰다. 현재도 국제화를 강조, ETRI의 국제적 연구기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