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100여년 만에 외화표시 국채 이자를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 가운데 국제금융시장에 대한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러시아가 실제로 갚을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경쟁국가 제재로 인해 이자 지급이 불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크라이나 사태 장기화에 대한 시그널이 더 확실해진 점은 불안 요인으로 지목됐다.
27일 블룸버그 등 외신은 러시아가 서방 국가들의 제재로 외화표시 국채에 대한 이자 1억달러(약 1300억원)를 지급하지 못해 채무불이행(디폴트)에 빠졌다고 보도했다.
◇1억달러 규모 국채 이자 미지급으로 발생
러시아 디폴트 가능성은 지난 4월부터 불거졌다. 러시아는 4월 4일 만기가 돌아오는 달러화 표시 채권 21억2940만달러(약 2조6600억원) 원리금을 갚아야 했다. 당시 러시아는 미국 등 서방 국가의 제재로 달러 상환이 어렵자 상환을 루블화로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채권단이 루블화 상환을 인정하지 않자 러시아는 유예 기간(Grace Period) 동안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 달러화로 원리금을 다시 지급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연체 이자 190만달러(약 23억원) 미지불에 대한 디폴트 판정이 내려진 바 있다.
이번 디폴트는 약 1억달러 규모 국채 이자를 지급하지 못하면서 발생했다. 해당 이자는 지난달 27일까지 지급돼야 했으나 30일간 유예기간이 주어진 바 있다.
러시아 정부는 국제예탁결제회사인 유로클리어에 이자 대금을 달러와 유로화로 보내 상환 의무를 완료했다고 주장했다.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에 '디폴트'라는 꼬리표를 달기 위해 인위적인 장벽을 만들었다”며 “이것은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국채이자 디폴트 '모라토리엄' 선언과 달라
정부에서는 현재 러시아 디폴트 논란이 아르헨티나 디폴트 혹은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엄 선언과는 결이 다르다고 본다. 당시에는 실제로 상환 능력이 없었고 때문에 국제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컸으나 현재 러시아는 상환 능력이 있지만 제재로 인해 상환을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세계 금융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과거 대비 줄어든 영향도 있다. 1998년 모라토리엄 선언 때는 미국의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가 파산하며 사태가 커졌으나 이번에는 그럴 가능성이 적다는 의미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전 세계 은행권의 러시아 익스포저는 1490억달러 규모이며 국내 금융회사의 대(對) 러시아 익스포저는 14억7000만달러로 전체 0.4%에 불과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이번 디폴트에 대해 “전쟁 자체가 인간의 고통과 세계 식량·에너지 가격 상승에 파괴적인 결과를 낳고 있지만 국채 디폴트는 시스템적으로 연관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오히려 디폴트 리스크가 본격적으로 부각된 4월보다는 상황이 진전되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다. 대부분의 디폴트와 모라토리엄은 채무를 진 국가에서 선언한다. 그러나 러시아처럼 상황이 복잡한 경우 신용부도스와프(CDS)를 감독하는 국제스와프파생상품협회(ISDA) 산하 신용파생상품결정위원회(CDDC)가 디폴트 여부를 판단한다. 4월 원리금 지급 지연에 대한 이자는 CDDC에서 디폴트라는 판정을 내렸지만 이번 1억달러 규모 이자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이 내려지지 않았다.
◇영향 제한적이지만 전쟁 장기화 우려도
다만 우크라이나 사태 장기화에 대한 시그널이 될 수 있으며 러시아가 지불을 하지 않을 가능성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질 전망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길어지면서 국제 유가 등 원자재 가격 급등 현상도 이어지고 있다.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교역연계성이 높은 유럽지역에 상대적으로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이나 곡물 수입의존도가 높은 비(非)유럽 지역 신흥국에도 인플레이션 부담을 키우는 중이다.
정민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부연구위원은 “러시아는 현재 금융시장이 안정된 상황으로 디폴트 얘기가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충격이 감지되지 않는다”며 “기술적 디폴트라고 하더라도 시장 충격이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면 러시아도 강경하게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러시아 디폴트는 예정됐던 상황이라 국제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며 “다만 우크라이나 사태가 장기화에 대한 확신을 더하는 시그널인 만큼 상황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최다현기자 da2109@etnews.com, 김민영기자 my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