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알파고'가 이세돌에게 완승하는 모습은 우리들의 직업이 사라질 곧 수 있다는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한국고용정보원에서 400개의 직업을 대상으로 직무 대체 확률을 조사한 결과 대체되기 쉬운 직업으로는 육체노동을 주로 한 단순 반복 직업이, 대체되기 어려운 직업으로는 작곡가와 화가처럼 감성과 창의력에 기초한 예술 관련 직업이 꼽혔다.
그러나 이 예상은 철저히 빗나갔다. 2021년 초 발표된 'DALL-E'라는 이름의 인공지능(AI)은 마치 디자이너에게 작업을 의뢰하듯 '아보카도 모양 의자'와 같은 문장을 입력받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림을 그려 컴퓨터 파일로 제공한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무지개색 불가사리' 같은 장난기 넘치는 그림을 그릴 뿐 아니라 당장 사용할 수 있는 품질의 아이콘 디자인도 순식간에 해낸다. 알파고와 같은 극적인 이벤트는 없었지만, 인간의 전유물이라 생각해온 창의력마저 어느새 AI가 깊숙이 발을 뻗은 것이다.
인류는 과거 세 차례의 산업혁명을 겪으며 기계에 자리를 조금씩 내주었다. 1차 산업혁명은 인간과 가축의 근력을 증기기관, 2차 산업혁명은 동력을 만들고 보내는 역할을 전기, 3차 산업혁명은 정보를 처리하는 역할을 인터넷에 맡겼다. 그로 인해 수공업자·타자수·주산학원 강사가 일자리를 잃었다.
홍익대 미술대학은 2009년부터 비중을 줄여가던 실기시험을 2013년 입시전형에서 완전히 폐지했다. 과감한 정책 변경의 배경과 이후 입학생의 교육 커리큘럼 등에 대해 우려와 토론이 있었으나 '컴퓨터로 디자인하는 시대에 손기술보다 창의력이 우선'이라는 논리는 내게 설득력이 있었다. 손끝의 구현도 중요하지만, 미술 본질은 독창성과 심미성이니 여기에 집중하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러나 오늘날 AI는 예비 작가들보다 빠르게 학습하고 더 많은 작품을 쏟아낸다. 학습 속도와 정확성은 사람이 기계를 당할 수 없기 때문에 좋은 디자인을 학습의 결과물이라 생각하는 디자이너에게는 설 자리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벌써 간단한 행사 포스터나 로고, 발표 자료에 사용할 조각 그림 정도는 인터넷에 공개된 인공지능을 사용해 만드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렇다면 디자이너의 꿈을 포기하거나 변화에 저항해야 할까. 그럴 필요는 없다. 변화의 내면에 있는 본질을 볼 수 있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변화도 자신의 능력을 펼칠 도구일 뿐이다. 고 김점선 화백은 몸이 불편해지자 붓 대신 컴퓨터로 병상에서 그림을 그렸고, 출판 시장의 규제를 피해 인터넷으로 옮겨간 만화가들은 웹툰의 시대를 열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과 협업해 독도를 그린 두민 작가, AI가 그리는 밑그림에서 영감을 얻는 정우재 작가 등이 AI를 능동적으로 활용하며 새로운 물결을 만들고 있다. 미술과 AI에 대한 이해가 깊은 이들에게 AI는 어쩌면 동료일지도 모른다. 반면에 인터넷에서 출판 만화의 문법을 고수하던 이들, 남이 공개한 AI 모델을 사용해 똑같은 스타일만 찍어내던 이들은 어느새 조용히 사라졌다.
필자가 몸담은 과학기술 분야도 AI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지만, 한편으로 기존 방식을 고수한 채 최신 기술만 가져다 쓰고자 하는 모습이 보여 우려스럽다. AI의 본질은 데이터다. 그런데 데이터는 외면한 채 남들이 만든 코드만 베낀다. 갓 쓰고 자전거 타는 격이다. 변화의 본질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진화라고 부른다. 모든 분야에서 AI를 활용하고자 하는 이들이 대체되지 않고 이를 기회로 한 단계 진화하기를 기대한다.
이제현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선임연구원 jehyunlee@kier.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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