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유행 이후 고공 성장했던 국내 가전 시장이 차갑게 식고 있다. '코로나 특수'가 사라지며 절대적인 수요가 줄어든 가운데 금리인상, 인플레이션 등 거시경제 압박까지 더해졌다. 소비자가 가전 구매에 지갑을 열지 않는다. 연말 카타르 월드컵 이벤트와 글로벌 가전 판촉 행사 등이 예고돼 있지만 성장 반등을 이룰지는 미지수다.
◇가전 수요 하락에 유통사 직격탄
국내 가전 유통시장에서 60% 이상 차지하는 롯데하이마트, 삼성전자판매(삼성디지털프라자), 하이프라자(LG베스트샵), 전자랜드 등 '빅4'는 코로나19 유행 이후 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삼성디지털프라자와 LG베스트샵, 전자랜드 등 3사는 지난해 역대 최대 매출을 달성하며 코로나 수혜를 톡톡히 입었다.
올해 들어 가전 유통 4사는 1~2분기 두 개 분기 연속 동반 매출 하락을 기록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4년 만이다.
올해 1분기에는 코로나 신규 확진자가 하루에만 30만명을 넘어서는 등 외부 활동이 위축된 데 따른 부진 영향이 컸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된 2분기 들어 부진이 이어진 것은 전반적인 수요 둔화 탓이다. 지난 2년간 상당 부분 가전 신규 구매나 교체가 이뤄짐에 따라 이제는 여행이나 레저 등 취미 영역으로 지출이 옮겨갔다. 실제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오프라인 유통업체 매출은 5월 기준 아동·스포츠(26.8%), 패션·잡화(19.3%) 등 영역은 전년 동월 대비 상승했지만 가전 영역은 9.7% 줄었다.
수도권 가전 유통점 관계자는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이후 매장을 전면 리모델링 하는 등 고객 맞이 투자를 집행했다”면서 “하지만 하루 평균 5~6팀 정도만 방문할 정도로 이전과 차이가 크게 없어 전반적인 수요가 줄었다”고 말했다.
◇소비심리 하락, 가전 구매력 더 떨어뜨려
국내 가전시장에서 잠재 수요까지 줄고 있다는 점은 전망을 더욱 어둡게 만든다. 가전 수요는 있지만 구매를 미루거나 우선순위에서 밀려 구매를 포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의미다.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 영향이 가장 크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인플레이션 위기에 우리나라도 최근 물가상승률이 6%대에 이를 정도로 지갑 열기가 무서워지고 있다. 생활비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필수재가 아닌 가전 구매는 후순위로 밀려 났다.
각국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대응을 위해 기준금리를 인상한 것 역시 가전시장에 직격탄을 날렸다. 한국은행 역시 기준금리를 0.5%P 인상한 이후 추가적인 인상 여지까지 두면서 주요 은행들도 연이어 예·적금은 물론 주택담보대출 금리까지 인상하고 나섰다. 이자 부담까지 늘면서 가전 구매력은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가전 업계가 수 년간 진행한 프리미엄 전략으로 가전 평균 가격까지 올라가면서 소비자가 비싼 가격표를 보고 놀라 소비를 줄이는 이른바 '스키커 쇼크'까지 현실화됐다는 분석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백화점, 대형마트 등 500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3분기 소매유통업 경기전망지수(RBSI)는 84로 집계됐다. RBSI가 100 이상이면 다음 분기 경기를 지난 분기보다 긍정적으로 보는 기업이 많고 100 이하면 그 반대다. 이번 조사 결과는 전분기 99보다 15P나 떨어졌는데 코로나 충격으로 급락했던 2020년 2분기에 이어 두 번째로 컸다.
◇재고 쌓이는 가전, 공급 조절 나서
수요 둔화에 소비심리 하락까지 겹치면서 가전 재고도 쌓이고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1분기 기준 삼성전자 재고자산은 49조5907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5%나 늘었다. LG전자 역시 해당 분기 10조2143억원 재고자산을 기록, 28%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장조사업체 DSCC는 삼성전자 2분기 재고회전일수가 역대 최고치인 평균 94일에 이를 것으로 봤다. 재고회전일수는 재고가 매출까지 걸리는 시간으로 길어질수록 기업 부담이 커진다. 재고 압박 속에서 주요 가전사는 협력사에 일부 부품 조달을 연기하는 등 공급물량 조절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DSCC는 “재고를 줄인다면 산업 가동률이 급격하게 둔화될 수 있다”며 “정확한 조정 액수나 시기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올 하반기 산업이 둔화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고 분석했다.
수요 둔화에 따른 공급 조절이 본격화되면서 시장 축소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는 지난달 올해 전 세계 TV 출하량을 2억879만4000대로 예상했다. 지난해와 비교해 474만3000대 줄어든 규모다. 옴디아는 지난 3월 연간 TV 출하량을 2억1163만9000대로 예상했는데 3개월 만에 하향 조정했다.
재고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마케팅 비용을 늘리거나 판매가를 낮추는 시도도 검토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올해 초부터 이어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와 코로나19 유행 이후 글로벌 공급망 붕괴 등으로 원자재·물류비가 폭등했기 때문이다. 올해 1분기 기준 삼성전자와 LG전자 원자재 매입 비용은 각가 28조662억원, 12조3690억원이다. 전년 동기 대비 24.3%, 15.4% 늘었다. 해당 분기 물류비 역시 두 업체 모두 각각 40.9%, 47.8%나 늘어나 수익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판매가를 낮추거나 마케팅 비용을 늘리는 것은 더 부담으로 작용한다.
문선웅 GfK 팀장은 “올해 상반기에는 오프라인 가전 매장뿐 아니라 온라인 매장도 매출이 하락했다”면서 “수요 둔화 영향이 가전 시장 전반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부진이 길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용철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