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마을로 유명한 일본 '아리타'에는 한국인 '이삼평'의 기념비가 있다. 비석 뒷면에는 '대은인(大恩人)'이라는 놀라운 문구가 기재돼 있다. 아리타에는 조선도공인 '이삼평'을 기리는 신사(神社)까지 있다. 임진왜란은 '도자기전쟁'이라고 불리는데, 임진왜란 당시 도자기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국가는 한국, 중국이었다. 일본은 당시 자기를 제작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도공을 잡아오라는 명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끌려간 도공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이삼평'이다.
사무라이 신분을 받으면서 1616년 마침내 조선도공 이삼평에 의해 일본 백자 원년이 시작된 셈이다. 또 이삼평, 심수관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도공에 의해 17세기에 일본자기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에 알려지게 되면서 수출하는 도자기 강국으로 대변신을 꾀하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라 도자기 수출을 통해 유럽 군함을 구입하고, 군수물자 생산 공장을 건설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며 군사대국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한다. 더욱이 가마기술은 철을 녹이는 데 활용이 됐다. 일본으로서 도자기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다. 이후에 조선침탈이라는 화살이 돼 돌아왔으니 도자기 역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조선 상황은 어떠했을까. 조선은 화려한 도자기 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세에는 깜깜했다. 중화사상에 젖어있어 서양에 도자기를 수출한다는 생각 자체가 어려울 정도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이었던 '하멜'이 13년간 조선에 억류돼 있었던 것만을 보아도 얼마나 폐쇄적 국가였는지를 알 수 있다.
또 도자기 기술자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선조실록'에 의하면 '쇄환하지 않더라도 손해 볼일이 없다'라고 적혀 있다. 즉 조선도공을 다시 조선으로 데리고 오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을 정도였다. 백성을 생각하는 지도층의 자세도 문제일 뿐더러, 도자기 기술과 도자기 기술자에 대한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뼈아픈 우를 범했다. 더욱 더 가슴 아픈 것은 조선도공들 또한 고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도공 이작광은 조선으로 돌아와 동생 이경을 데려가는가 하면, 어떤 도공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정도였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면 고국에서 천민대우를 받아가며 살아갈 생각을 하니 심경이 복잡하였으리라.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대접을 받으니 말이다. 1697년 숙종때의 '승정원일기' 에는 “이익을 위해 그릇을 만들지 못하니, 분원에서 굶어죽는 자가 39명이나 된다”는 기록까지 있을 정도로 조선 도자기 현실은 매우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이처럼 도자기의 역습은 우리에게 급변하는 21세기 소리 없는 총성 산업전쟁시대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국제정세 무지함으로 인해 화려하고 국부창출을 할 수 있는 산업이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 도자기 기술을 앗아간 일본과 도자기기술을 빼앗긴 조선에 대해 '조선은 착했고 일본은 나쁘다'의 일차원적인 틀 속에서 일본을 비난하는 것을 뛰어넘어, 당시 우리가 놓쳤던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반성부터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본을 탓하기에 앞서 말이다. 그렇다고 일본 행위가 옳다고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불편한 진실에 마주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가슴 아픈 역사의 전철을 밟지 않게 될 것이다.
그토록 화려했던 도자기 강국이었던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도공의 이름이 있는가? 사농공상에 얽매어 제대로 조선은 도공을 우대하지도 못했다. 도자기 산업을 키우지도 못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무명도공의 비'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가. 그래서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인 것이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홍대순 글로벌전략정책연구원장, '한국인에너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