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ESG 경영, 정부 R&D 뒷받침이 필요하다

정양호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장
정양호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장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국내 기업 ESG 확산·정착 대응 현황

미국 드라마 '드롭아웃'(The Dropout)은 실리콘밸리 최대 사기극으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홈스의 실제 이야기를 담았다. 미국 바이오기업 테라노스의 대표이던 그는 피 한방울로 250여가지 질병을 진단하는 최첨단 기술을 개발했다고 발표했지만 모두 거짓이었다. 오히려 실험 결과 조작, 직원 감시, 해고 등이 드러나며 가치가 10조원이 넘던 유니콘 기업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윤리적으로 부도덕한 기업은 설 자리가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다. 실제로 이 기업에 미디어 업계 거물 키스 루퍼트 머독, 월마트·암웨이 창업자 등이 거액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만약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 관점에서 투자 결정이 이루어졌다면 이와 같은 사기극은 없지 않았을까.

친환경(Environment), 사회적 책임(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핵심 가치로 하는 ESG 경영은 기업 생존과 성공 요건이 되고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뿐만 아니라 모건스탠리, 블룸버그 등 글로벌 금융회사는 비(非)재무적 성과지표인 ESG를 투자 결정에 참고하고 있다. 유럽연합(EU)과 캐나다에서는 이미 ESG 경영공시를 의무화했으며,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에서는 상장기업의 탄소배출량 정보 등을 의무로 공개하는 규제 초안을 마련했다.

실제로 애플은 납품하는 부품사에 재생에너지로 제조할 것을 요구했다. 유럽의 H&M과 아디다스 등 의류업체는 '강제노동'을 이유로 중국 신장지역의 면화 사용을 중지했다. 월마트는 인권성명서를 발표하고 모든 협력사에도 이를 준수할 것을 요청했다. 이처럼 ESG 경영을 하지 않으면 자금 조달과 거래가 어려워 시장에서 외면받을 수 있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자산 2조원 이상 기업은 2025년부터 ESG 경영 공시를 의무화한다. 해당 기업뿐만 아니라 협력사 전반에도 공시 기준에 부합한 ESG 경영의 영향권에 들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그럼에도 국내 기업의 ESG 경영 대응 수준은 다소 미흡하다.

[ET시론] ESG 경영, 정부 R&D 뒷받침이 필요하다

지난해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실시한 'ESG 확산 및 정착을 위한 기업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내기업의 ESG 경영 수준은 5점 만점에 2.9점으로, '보통 이하' 수준을 보였다. ESG 대응을 준비하고 있는 기업은 21%에 불과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6월에 발표한 'ESG 대응현황 조사'에서 중소기업은 거래처로부터 ESG 요구가 높아지고 있는 데 비해 관련 정보가 부족하고 지원이 전혀 없어 오롯이 기업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ESG 관심과 기대에 비해 아직 상당수 기업은 ESG 경영 실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ESG 경영이 피할 수 없는 시대 흐름이라면 ESG 경영을 필두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 동력에 연구개발(R&D)이 중추 역할을 할 수 있다. R&D를 통해 개발된 혁신 기술이 ESG 가치를 실현하는 '인에이블러'(Enabler·조력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글로벌 선진기업은 최첨단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자사의 비즈니스에 접목해서 기업이 직면한 이슈와 사회 환경 문제 등 ESG 가치를 동시에 해결해 나가고 있다. 구글은 인공지능을 통해 인류가 직면한 홍수나 지진과 같은 재해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연구하고 있으며, 독일 기업 바스프는 자사의 6만개 전 제품에 대해 사회·환경·경제적 기여도를 평가해서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하고 친환경·사회적 가치가 높은 제품군 비중을 R&D를 통해 늘려 나가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정유사 엑손모빌은 연간 700만톤 탄소포집·저장 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바이오 연료로의 전환을 위한 기술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기업 R&D 투자와 ESG 경영은 상충관계가 아니라 동시 만족이 가능한 좋은 수단이자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적·물적 자원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중소기업은 공정과 제품에 신기술을 접목하거나 미래 성장동력을 스스로 개발하고 시장을 개척하는 데 한계가 있다. 기술개발은 오랜 시간과 막대한 투자가 전제되기 때문에 정부의 R&D 역할이 필요하다. 그린에너지, 태양전지 등과 같은 신재생에너지, 이산화탄소 포집과 같은 핵심 기술을 개발할 수 있도록 장기 지원하는 등 우리 기업이 ESG 경영에 나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해 12월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R&D 로드맵인 '2050 탄소중립 에너지기술 로드맵'을 수립했다. 로드맵에는 탄소중립 관련 13대 분야 197개 핵심기술에 대한 개발 일정과 확보방안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산업공정 및 저탄소화를 위한 대규모 탄소중립 R&D 사업도 기획하고 있는데 R&D 예비타당성 조사 대상사업 가운데 최대 규모다. 본 사업이 본격화되면 ESG 경영의 핵심 줄기 가운데 하나인 탄소중립 분야의 핵심기술 확보와 산업 판도 재편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ESG 경영은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대외적인 시선을 무마하기 위해 보여 주기식 사회봉사 활동을 하는 이른바 '그린워싱'(Greenwashing·위장 환경주의)을 경계해야 하며, 생존을 위한 진정성 있는 접근이 필요하다. ESG 가치 실현에 R&D 투자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중장기 로드맵을 기반으로 R&D와 ESG 경영을 접목해 간다면 기업의 지속 가능 성장과 탄소중립 선도국가로서 경쟁력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

정양호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장 yhchung@keit.re.kr

<필자> 행정고시 28회로 공직에 입문한 정통 관료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산업기술정책관, 에너지자원실장 등을 거친 후 조달청장을 지냈다. 다방면에서 쌓은 경험으로 에너지와 산업, 연구개발(R&D) 분야에 박식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장으로는 취임 첫해에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응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핵심 기술개발 사업을 지원했다. 코로나19에 대응해 온라인 R&D 평가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R&D 시스템 개혁에도 앞장섰다.